장마

도서관 입구에서 아이에게 대출카드를 넘겨주며 말한다. 비밀번호는 4321이야. 아빠 이쪽 연속간행물실에 있을테니까 책 빌려서 이리로 와. 녀석은 네, 하고 어린이 열람실로 간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문예지 한 권을 뽑아들고 자리에 앉는다. 이제 눈이 침침해 표지 글씨도 잘 안보인다. 목차를 빠른 속도로 스캔한다. 녀석이 언제 책 다 빌렸다고 들이 닥칠지 모르니 ‘엑기스’를 골라 읽어야 한다. 신작 시를 앞에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최승자 때문이다. 최승자 시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최승자가 58세 구나. 그러나 시가 읽히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쩌다 한 구절 눈에 들어온다. 어떤 시는 무슨 말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뿐이다.

그렇게 시를 한 열다 섯 편 정도 읽었을까. 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누구일까. 비 온다고 술 마시자는 전화일까. 아니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어디야? 책 다 빌리면 건너 오라니까 웬 전화지? 어차피 열람실 안에서 전화는 받을 수 없으므로 전화기를 든 채 로비로 나선다. 어린이 열람실은 로비 건너 편에 있다. 어린이 열람실 입구에서 녀석이 나랑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전화를 끊고 녀석에게 간다. 녀석의 왕방울 만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이는 커뮤니케이션 에러의 대가를 눈물로 치르고 있다.

나는 녀석을 데리고 어린이 열람실로 들어간다. 여기는 뭐가 있나? 서가를 이리저리 다녀본다. 이리오너라, 업고 놀자. (그래, 나 방자전 봤다.) 책도야 많다. 세계 명작은 대충 축약본이고, 왠만한 책은 다 만화화되어 있다. 이쪽저쪽 구석에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뭘 읽나 가까이 가서 보면 거개가 만화책이다. 내남할 것 없이 다 만화책만 보고 있다. 책을 몇 권 고른다. 집에 있는 아이들도 볼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화 메밀꽃 필 무렵, 만화 리바이어던, 만화 삼포 가는 길, 완득이 따위를 빌린다. 돌아보니 녀석은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만화책을 읽고 있다. 가자. 아마 반납일이 다 돼도 아이들은 내가 빌려온 책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하 생략)

“쥐로 산다는 건 참 힘들겠다.”

“쥐로 산다는 건 참 힘들겠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 아냐. 사람들은 펄쩍 뛰며 도망치기 일쑤고 ‘앗, 끔찍한 쥐!’라고 소리치지. 만약 사람들이 날 보고 비명 지르며 펄쩍 뛰고, ‘앗, 끔찍한 사라!’ 하고 소리치며 날 잡으려고 덫을 만들어 거짓 저녁거리를 넣어 둔다면 아주 싫을 거야. 참새로 사는 것과는 달라. 하지만 이 쥐도 원해서 쥐로 태어난 건 아니야. 아무도 ‘너 참새가 될래?’라고 묻지 않았어.”

“I dare say it is rather hard to be a rat,” she mused. “Nobody likes you.  People jump and run away and scream out, `Oh, a horrid rat!’  I shouldn’t like people to scream and jump and say, `Oh, a horrid Sara!’ the moment they saw me.  And set traps for me, and pretend they were dinner.  It’s so different to be a sparrow. But nobody asked this rat if he wanted to be a rat when he was made. Nobody said, `Wouldn’t you rather be a sparrow?'”

─ 프랜시스 호치슨 버넷, <<소공녀>> 중에서

그러니 사람들아, MB한테 너무 뭐라 그러지 마라.

남대문 연가

2010년 6월 15일 오후 2시
6.15 선언 10주년 기념으로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자
한국은행 금융박물관에서 막 걸어 나오던
중년의 외국인 남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국민학교 시절
민방공 싸이렌이 울리면
작아서 잘 들어가지도 않던
정부미 비닐봉지를 복면강도처럼 얼굴에 뒤집어 쓰고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숨막혀
답답해
하던 기억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그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이미지가 점령한 거리
야, 우리가 아르헨을 어떻게 이기냐?
형, 내기 할래요? 만원 내기?
오토바이 배달 서비스맨 두 명이 시답잖은 내기를 벌이며 지나간다
어려운 일 생기면 연락하라던
고교 동창이 하는 병원이 아마 저기 어디 쯤일 것이다
날은 더운데 버스는 안오고
날이 더우면 그리운 사람도 그립지 않다

아이언맨하고 배트맨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일요일 오후, 영화가 한창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동생들 데리고 놀러나간 딸이다.

여보세요?
아빠.
왜?
응, 우리 지금 끝말잇기 하는데 ‘늘보’라는 단어가 있어?
몰라.
에이.
그냥 취소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
안 돼. 우리 지금 아이스크림 내기했단 말야.
오우, 그래? 알았어. 전화해 줄게. 기다려.

보던 영화 멈춰 놓고 사전을 찾는다. 있다. 늘보. 명사. 느림보의 준말. 전화 건다.

어, 나우야. 찾아보니 있다. 느림보의 준말이란다.
얏호.
끊어.
야, 있대. 있대. (fade out)

있든지 말든지, 나는 보던 영화나 마저 본다. 배트맨 신세 참 처량하게 됐군. 레이첼에게 버림 받고, 레이첼은 죽고, 지가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쿨한 척 스스로 누명 쓰고……
그런데 아이언맨하고 배트맨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p.s.
현장에 있다가 방금 귀가한 막내에 의하면 아직도 그 단어가 있다 없다 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