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광 燭光 칸델라 candela candle 초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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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ed by 거시기님

초의 본래의 용도는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촛불은 독서나 바느질 등 실용적 목적의 조명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무드나 분위기 조성을 위한 조명으로 사용된다.)

종이컵의 본래의 용도는 액체를 담아 마시는 것이다. (빈 컵은 재떨이로 사용하거나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공작의 재료로 쓴다.)

위 사진 속의 초 하나가 뿜어내는 빛의 밝기가 1촉광cd이다. (정확히는 1燭이 1.0067cd라고 한다.) 30촉짜리 백열 전구의 밝기는 저런 거 30개의 밝기다.

2004년 3월 20일, 거리에 켜진 촛불의 밝기는 몇 촉일까?

아무튼지 아내여, 나도 카메라 달린 핸드폰 하나만 사주라. 나도 저런 거 한번 찍어보자.

하하. 바구니 만들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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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디비 자는 데 ‘우’가 깨우더니.

__아빠.
__응.
__바구니 만들 줄 알어?
__바구니?
__응.
__글쎄.
__아빠. 바구니 만들어 줘.
__아빠 바구니 못 만드는데…
__아이, 빨리 만들어줘.
__알았어. 색종이 가져와.

해서 바구니를 만들어 주었겠다. 잠도 깨고 해서 거사를 치루는 데
‘엽’이가 쪼르르 오더니

__아빠.
__응.
__나도 바구니 만들어줘.
__지금?
__응.
__알았어. 색종이 가져와.

해서 또 거사를 치루다 말고 바구니를 만들어 주었겠다.
맘 놓고 일을 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__엄마.
__응.
__이거 오릴 줄 알아?
__몰라.
__아이, 엄마 이거 오려줘.
__아빠한테 해달라고 그래.
__알았어.

하더니 쪼르르 달려 온다.

__아빠. 이거 오려줘.
__그게 뭔데.
__이거, 응 하트하고 별하고…응 또 이거하고

해서 보니 그런 모양이 새겨진 자를 들고 있다.
할 수 없이 자를 색종이에 대고 칼로 도려냈다.

사진은 그 결과물이다.
그나마 꼬맹이가 자서 그렇지.
안 그랬음 저런 바구니를 세 개나 만들 뻔 했다.
역시 자업자득!
혹은 애 셋 아빠의 가혹한 운명.

따위

여자는 더 이상 이혼남이나 상처한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따위의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밥투정 따위나 하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만 하면 나만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기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오빠와 올케들은 쉴새없이 선본 남자는 어떻게 되었냐, 네 나이가 몇인데 고르냐, 남자들 살다보면 다 같다는 식의 얘기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이정은, ‘붉은 끈끈이주걱’, <문예중앙>104, 2003 겨울

나는 지금 자전거 박물관에서 크랭커-31이라는 자전거의 설명을 듣도 있는 중이다. 박물관에는 하루에 한 번 자전거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시간이 있는데, 운 좋게도 그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설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하해봤자 세 명뿐이다. 하긴, 평일 한낮에 자전거의 역사 따위를 듣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김중혁, ‘바나나 주식회사’, <문학과 사회> 64, 2003 겨울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기형도, ‘죽은 구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

“나는 이해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지. 나는 눈보라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서 선원들에게 날 돛대에 잡아매게 했지. 난 묶인 채로 네 시간을 보냈고, 그 눈보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꼭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느꼈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그리을 좋아해야할 필요 따위는 없다네.”

Snowstorm, 1842; Oil on canvas, 91.5 x 122 cm

//Turner, John Mallord William (1775-1851). 존 버거(지음), 박범수(옮김) <<본다는 것의 의미(원제: About Looking)>>, 동문선, 2000년 초판, 2002년 2쇄, p214에서 재인용

이제 와서 그날의 눈을 기억함. 물론 아무 소용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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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많은 눈이 내렸다 세상의 길들이 빠른 속도로 두절되어 갔다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은 눈송이들 사이로 서로 안부를 묻거나 감정을 전하는 전파들이 부리나케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나도 공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지금 여기’에서 ‘지금 거기’를 향하여 단축키를 길게 눌렀다

상처가 아문 자리…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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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이게 상처야.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아. 하지만 흔적은 남아.”

라고 말하며 제 팔뚝의 상처를 보여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 비유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다 나아서 아프지 않은 자리는

상처가 아니라 ‘흉터’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가 되고 사람이 사람에게 흉터로 남는

세상, 얼마나 더 ‘분신’해야 이 흉터가 지워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