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학통지서

국가가 딸아이의 취학통지서를 보내왔다.
국가. 지까짓게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기분 나쁘다.
훈련병들에게 똥이나 먹으라고 강요하는 수준인 주제에.
국가 따위가.

벌초 伐草

배기량 40cc, 출력 2.0마력의 2사이클 공랭식 엔진을 탑재한 예초기를 둘러 맨 사람들이 무덤의 풀을 깎기 시작한다. 무섭게 돌아가는 예초기의 칼날에 무덤에서 자라 무덤에 뿌리박았던 풀잎들은 힘없이 잘려나가 무덤주변에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엊그제 제 어머니를 이곳에 묻은 사람의 슬픔은 요란한 예초기 소리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누대를 걸친 조상들의 묘를 이곳으로 이전한 것은 종손새끼가 문중 선산을 팔아 꿀꺽 삼켜버린 다음이다. 그게 어떻게 네 땅이냐 문중 땅이지? 아, 법적으로 하세요. 법적으로! 그저 한 조상의 자손들이라는 것 밖에는 우리는 누가누구인지 서로 잘 모른다. 본의 아니게 내리 4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는 당숙이 결산보고서를 돌린다. 지난해 이월금이 일금 삼억칠천오백육십이만원이고 올해 잔액은 삼억이천칠백오십삼만육천원이다. 오늘은 운전하다가 시비라도 붙으면 서로 멱살잡이를 할런지도 모르는 어떤이씨 당구공파의 자손들이 모두모여 벌초하는 날, 개를 두 마리나 잡았다. 개고기 안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백숙도 준비되어 있다. 어르신들은 낮술에 얼굴이 불콰해져가고 젊은 새댁은 구석에서 우는 아기에게 젖병을 물린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잠시 지난 시절 얘기꽃을 피우면 그뿐, 한조상의 자손들이라는 게 도무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은 또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돌아오는 길, 차가 어정을 지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가구를 만들고 있다. 저 곳에 옛날에는 문둥이들이 살았었어. 아버지는 기어이 작년에 재작년에 재재작년에 하셨던 말씀을 입에 담는다. 그 옛날 아버지의 외할머니는 친손주는 피난 데리고 가고 외손주는 소 지키라고 이 곳에 남게 했다. 아무리 난리 통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지만 시집와 이 말을 들은 내 어머니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소와 함께 혼자 남겨진 소년을 생각한다. 그 소년이 어쩌다가 죽지 못하고 어쩌다가 살아남아 지금의 나를 낳았다.

말 못하는 아다다에게

마침내 네오가 제 몸을 날려 스미스 요원의 몸을 투과해 지나갔다.
순간 스미스 요원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내 스미스의 요원의 몸이 여러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갈라진 틈새마다 빛들이 갈기갈기 쏟아져 나왔다.
아, 저 몸 속에도 빛이 들어 있었구나.
사정이 이와 같으니 아다다야, 아다다야.
우리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각자의 몸속에 켜켜이 슬픔의 빛이나 죽도록 쌓자.

부끄러운 커서 6

소식 끊긴지 오래구나.

곧 무너져 내릴 빙벽에 매달려
담담하게 묻는다.

잘 사니?

이거 묻는 것도
내 커서는 숨이 차다.

나는 결국엔 갈라질 것들만 사랑했다. 유리는
처음부터 균열을 품었다.

이제 다 갈라져 간다.
곧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