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

1.
비오는 밤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와이퍼 따위로는 걷어낼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자꾸 닦아내면서.

그날의 소실점이 보고 싶었진 것일까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갔고
RPM이 순간적으로 4000까지 올라갔다.

2.
Terminal Velocity
비행기가 양력을 받아
마침내
떠/오/르/기/시/작/하/는/속/도

3.
“이봐. 차에는 날개가 없어.”
“아참 그렇군.내 정신 좀 보게.”

4.
“그러나 과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날아오를 수 없는 걸”

안개 낀 아침의 “당연하지” 놀이

베란다 밖 세상에
안개가 자욱하고
내가 탄 아파트가
한 척 쓸쓸한 배로 떠있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나는 어쩐지 조동진의 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엊그제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는 작은 배에서 내려
씩씩하게 학교로 갔다

나도 아파트에서 내려
800번 버스를 타고
“이번 정차할 곳”을 지나
“연희동 104 고지, 구 성산회관 앞”을 지나
“서대문우체국 앞”을 지나왔다

지나오기는 왔는데
문득 더 갈 곳도
내려야 할 곳도 모르겠다

너 멀리 떠나고 싶다며?
당연하지!
그런데 너 멀리 떠날 수 없다며?
당연하지.

인간 봄나무

봄이다 한 그루 나무로 서있고 싶은 봄이다
머리통은 땅속에다 과감하게 처박고
팔다리는 한껏 벌린 채
한 그루 엽기적인 인간나무가 되어
토하도록 햇살이나 받으며 서있고 싶은
봄이다 지금은 또 간신히 봄이다

일반인들에게 처음 감명을 준 것은 이 저술들이 만들어진 극적인 배경이었다. 왜냐하면 구석구석마다 세심하고 완벽한 달필로 가득 메워진 이 조그만 정사각형의 종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몸을 상하게 했던 무수한 질병들 — 구토, 불면증, 동맥경화증, 결핵, 척추 카리에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질환 — 과 싸운 한 인간의 노력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글자 그대로 감옥 안에서 시들어가고 있었고, 이빨이 빠져나가고 위가 망가지는 속에서 글을 썼던 것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42, 2004(1판 8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