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젓는 사람

아빠, 삼각형 드라이버 있어?
없는데.
……
뭐 뜯게?
응, 이거.

녀석이 내미는 건 장난감 곤충이다. 태엽을 감으면 뒤뚱거리며 앞으로 움직이는.

너, 또 태엽 꺼내려고 그러지?
응.

이게 벌써 네 개째다. 태엽 꺼내느라 녀석은 이틀 동안 멀쩡한 자동차 두 대와 지 동생이 유치원에서 받아온 과학 교재를 망가뜨렸다.

이리 줘봐.

나는 일자 드라이버와 뺀찌로 플라스틱을 절개하고 태엽을 꺼내 준다.
녀석, 일단 후퇴한다.

잠시 후, 녀석이 태엽을 다시 가져 와서 말한다.

아빠, 이 거나 이 거 둘 중의 하나 빼줄 수 있어?
줘봐.

나는 녀석이 빼달라는 걸 빼려고 해본다. 용을 쓴다. 안 빠진다.

안 빠지는데.

녀석은 실망한 얼굴로 물러간다.

잠시 후,
녀석이 중얼거린다.

아,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는 무시하고 내 할 일 한다.

아빠 못쓰는 건전지 있어?

난 서랍에 굴러다니는 건전지 두 개를 찾아 준다.
녀석, 사라진다.

저게 또 뭘 만들려고 저러나, 그러나
나는 무시하고 내 할 일 한다.

아래는 우드락과, 글루건과, 커터칼과, 못쓰는 건전지와, 멀쩡한 장난감에서 빼낸 태엽장치를 이용해서
녀석이 만든 결과물이다.

볼품은 없는데 태엽을 감아서 놓으면 노를 젓는다. 진짜다. 나 뜨슨 밥 먹고 식은 소리 하는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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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 단성사의 그림자

아이들 데리고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옛모습이 사라진 단성사와 명보극장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컴퓨터로 다운로드하여 따위넷에 올리려 했으나 어디 갔는지 인터페이스 케이블이 아니 보인다. 그래서 못 올리는데 올리면 또 무얼하겠는가 싶기도 하다. 추위에 떠는 아이들이 안스러워 명보극장이 내려다 보이는 2층 식당에서 수타 짜장면을 사먹였다. 올해는 포스트 말미마다 “어둡고 바람부는 밤이었다”를 변주해 봐야겠다.

고양이가 부엌에서 사료를 먹는 소리가 들린다. 어둡고 바람부는 겨울밤의 일이다.

송년

눈썹에 여드름이 났다
짰다
아팠다
그리고 더러웠다

이게 올해의 나의 절실한 노래다 달리
무얼 노래하겠는가

메리와 크리스마스의 유착관계를 끊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찢어 놓기보다 어렵다

1.
어린이가 한 명도 없는
우리 동네 어린이 놀이터에는
그네가 세 개
미끄럼틀이 두 개
시이소오가 세 개
파란 로케트가 한 대
빨간 말이 한 마리
노란 자동차가 한 대
벤치가 여섯 개

2.
매우 반짝이는 희대의 명코를 가졌던, 그리하여 다른 모든 사슴들이 놀려대며 웃었던 루돌프가 그 가엾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안개 낀 성탄절과 산타의 특별 채용이 그것이다. 루돌프는 운이 좋았다.

엊그제 어느 술자리에서 시의회 의원나으리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이 내게 딱 두 번 말을 시켰는데 그게 다 내 코 얘기였다. 웃으며 응대를 해주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욕을 두 바가지 쯤 퍼부어 주었다. ‘넌 그쪽 업계에서 대성하기는 영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에코는 <서재에 장서가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메아리>라는 뜻의 이름 때문에 이런 식의 농담을 들으며 자랐다. ‘넌 언제나 대답하는 사람이로구나.’ ‘네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퍼지고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 뻔한 농담만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멍청할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그 의원나으리께 정중하게 인사나 해야지.
메리 베리 “멍청” 크리스마스 앤 어 해피 베리 “멍청” 왕창 뉴 이어.

시절은 하수상해도 연말은 연말이라 아내도 나도 각각 약속이 있어 아이들만 두고 잠시 나갔다 왔다. 그리하여 묻노니 따위 주니어들이시여, 그대들끼리 계시니까 어떠시든가? 견딜만하시던가? 이에 막내놈이 천연덕스럽게 가로되, 우리들끼리 있으니까 더 좋던 걸요. 자유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