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의는 미끄러진다.”

“언어과학이 내건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기표와 기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저항선에 의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특정한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의미화 작용을 대신할 만한 어떤 초월적 기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 갈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기의는 미끄러진다. 기의가 미끄러진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기의 따위는 그만 포기하고, 오오 미련을 버리고, 기표들의 연쇄작용에나 ─ 의미를 만드는 것은 이것이므로 ─ 신경쓰라는 건지. 처음부터 아예 뭐든지 의미하려 들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기왕 미끄러질 거 열심히 미끄러지겠다, 라는 심정으로 의미할 수 없음을 절망하라는 건지.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나 나나 결국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걸.

버스에서 낯선 사람과 함께 앉는 것에 대하여.

낯선 사람 옆에 앉는 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든 버스에서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앉게 마련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앉기 위해 그들 사이에 남겨 놓는 사람과 사이의 빈 공간, 나는 이 빈 공간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완충지대’라 부르겠다. 너무 길다. 줄여서 그냥 ‘완충지대’라 해야겠다. 심리학적으로 이 ‘완충지대’를 의미하는 용어가 있었던 듯도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소의 시간. 버스를 탔는데 나 앉을 자리는 완충지대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 완충지대나 앉았다. 그런데 아무데나 앉았다는 이 말 정말일까? 아닌 듯하다. 나는 남아있는 완충지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랐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르는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말하겠다.

어쨌든 내가 자리에 앉자, 이번 생에서 나와 한 30분 정도 근거리에 앉는 인연을 맺게 된 옆자리의 여자는, <쩝. 여기 말고 자리 많은 데 이 아저씨가 하필이면 왜 여기 앉는 거야. 젊으나 늙으나 그저 예쁜 건 알아가지고...>하는 생각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창가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 나와 저 자신 사이에 다만 몇 센티미터라도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다.

(졸리다. 날 밝으면 계속)

날 밝으니 다 귀찮다.

잃어버린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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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버스에다 FM2를 놓고 내렸다.
까맣에 잊고 있다가 저녁 나절에 생각이 났다.
버스 회사에 문의 했으나 그딴 거 없단다. 슬프다.
되도 않은 사진은 이제 그만 찍으란 뜻인 모양이다.
감각있는 새주인 만나 좋은 사진 많이 찍어주길 바란다.
옆에서 아내가 쯧쯧한다.
따위넷 매니아 여러분들도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일동 3분간 광적으로 쯧쯧 해주시기 바란다.

악마와의 동침

로버트 베어 지음, 곽인찬 옮김, < <악마와의 동침>>, 중심, 2004

걸프전이 나던 해 어느 날 세상에 함박눈이 내렸다.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 몰려 나와서 눈싸움을 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두 편으로 갈렸는데 서로들 자기네가 ‘다국적군’이라고 우겼다. 아이들이었지만, 아니 아이들이었기에 더더욱 ‘다국적군’이라는 ‘정의의 타이틀’을 양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걸 양보한다는 건 자신들이 다국적군의 적, 즉 ‘악’이 된다는 건데 차라리 눈싸움을 안 하면 안했지, 그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아이들의 눈싸움은 결국 두 정의의 다국적군의 싸움이 되었다.

그 다국적군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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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y in the mirror is closer than he app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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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에 여기저기서 너두나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던 하길래
쟝 보드리야르인지의 <<소비의 시대>>를 사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다른 건 기억에 없으되
“대상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
The 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rear”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적혀 있는 글귀를 가지고서
뭐라뭐라 했던 건 생각이 난다.

옛 애인에게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며
사이드 미러를 겨냥하고 있다가
대상이 거울 속에 들어오는 순간 찍었다.

과연 거울 속의 대상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
지금 저 혼자 텔레비젼 보구 있으니.
일어나자 마자 우유 한 잔 꿀꺽꿀꺽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