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 밥솥

2월 하순에 압력 밥솥을 새로 샀는데 압력추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 서너 번 밥을 더 해봤으나 마찬가지다. 그대로는 못쓸 것 같아서 제조업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압력이 새는 것 같다며 고무바킹을 새것으로 보내준단다. 그러나 새 고무바킹을 장착하고 밥을 해도 달라진 게 없다.

삼일절 연휴를 보내고 화요일 날,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는 밥솥을 택배로 보내란다. 그것도 증상을 간단하게 메모해서 밥솥에 넣어가지고. 그래야 기사가 점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서.

수요일 날, 요구대로 메모를 해서 우체국 택배로 밥솥을 보냈다.

목요일 날, 일전에 보내준 고무바킹은 잘 받으셨느냐는 전화가 왔다. 이럴 때 헐, 하는 거 맞겠지. 상황을 전했더니 그러시냐고 죄송하게 됐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전화를 끊는다.

금요일 날 그러니까 어제, 기사라는 사람의 전화가 왔다. 두 차례 압력시험을 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추만 잘 돌고 밥도 잘 된다고,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고, 그는 말했다. 혹시 몰라서 고무바킹과, 압력추 옆에 김 빼는 데 쓰는 밸브도 새것으로 교환해서 다시 보내 드릴테니 잘 쓰시라고 했다.

토요일 날 그러니까 오늘 오전, 밥솥이 다시 왔다. 설레는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으로 밥을 지었다. 달라진 게 없다. 압력추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피식피식 김 빠지는 소리만 난다. 김 샜다.

압력 밥솥은 열을 받아 내부의 압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김이 빠져 나오면서 압력추가 돌도록 설계 돼있다. 소비자도 열을 받아 내부의 압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김이 빠져 나오면서 슬슬 꼭지가 돌게 돼 있다.

월요일 날,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한다.

새학년 새학기

맏딸은 이제 6학년이다. 돌 전에 걷기 시작해서 돌잔치날 부페를 휘젓고 다녔다. (어머니가 옛말에 자기 돌잔치날 떡 돌리고 다닌다더니 딱 그꼴이네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부터 귀에 이어폰 끼고 산다. A4 용지를 수북히 쌓아놓고 밤마다 잠자리에 엎드려 뭔가를 그린다. 슬슬 시작인 것이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보이쉬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명랑하고 사교적이고 적극적이다. 앞으로 43분에서, 뒤로 17분까지 그네를 타고 허공을 가를 줄 안다. 제 어미 키를 추월할 날이 머지 않았다. 태권도 3품.

둘째는 이제 4학년이다. 위로 누나한테, 아래로 동생한테 치여 산다. 요즘 들어 부쩍 언어의 의미와 표현의 불일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예민함은 주로 말꼬리 잡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언어는 불완전한 것이며 대충대충 쓰는 거라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는 거라고 틈날 때마다 세뇌시키고 있다. 닮을 걸 닮아야지. 미술에 소질이 있고 만들기에 재주가 있다. 그 방면으로 밀어줄까 고민중. 태권도 2품.

막내는 이제 2학년이다. 아무한테나 척척 안기는 스타일. 이래저래 맑고 천진하다. 1학년 담임은 매사에 질문이 많다, 고 생활통지표에 적어 보냈다. 언어 감각이 좋아 대가리에 든 거 없이 입만 나불거리지 않도록 키우려면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중. 매운 음식을 유난히 못먹어 라면도 별도로 순/하/게 끓여줘야 한다. 누나 형아는 ‘진즉에’ 수영을 가르쳤는데 이 녀석만 아직이라 올해는 수영 강습 받게 할 예정. 태권도 2품.

위 세 개 문단을 요약하면 이렇다. 맏딸은 이제 6학년이다. 둘째는 이제 4학년이다. 막내는 이제 2학년이다. 첩첩산중이다.

완자 전쟁

아침 식탁에 앉았는데 완자가 있다. 오, 완자여! 너 본지 오래다. 맛을 보니 덜 익었다. 그러나 아내는 익었다고 말하고 아이들도 이구동성으로 괜찮다고 한다. 잠시 뒤 아내가 후라이판에서 방금 구운 완자를 더 가져다 놓는다. 그 중의 한 놈을 골라 반을 쪼개니, 나의 승리!, 덜 익은 게 눈에도 보인다. 봐, 덜 익었잖아, 내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자 나는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지른다. 아내가, 덜 익었으면 여보, 완자가 덜 익었으니 더 익혀줘, 하면 되지, 승질이야!, 한다. 그러자 정말 승질이 났다. 안 익을 걸 안 익었다고 말하는데 왜 니들끼리 편 먹고 나를 소외시키는데, 난 완자 안 먹어, 니들끼리 다 먹어, 해버렸다. 밴댕이 속알딱지 하고는. 아내가 중얼거린다. 좋다. 전쟁이다. 어차피 난 늘 고독한 늑대였으니까.

남은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어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식탁을 떠나와 책상 앞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사과를 깎아다 준다. 나는 또 안 먹어, 해버린다. 아내는 실실 웃으며 옹졸하기는, 하고 받는다. 전쟁이야, 전쟁! 어디 누가 이기나. 1: 4로 한번 붙어보자구. 이 말을 듣자 큰놈이, 언아, 무기를 준비해야겠다, 고 말한다. 작은 놈이 대답한다. 엉, 알았어, 형아!

나 혼자 토루쿠 막토가 된 기분이다. 이 전쟁은 완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사의 한 챕터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p.s.
전세가 불리하다. 저쪽은 벌써 고성능 무기를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