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하루 라면만 먹고 달려보고 느낀 것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깡마른 소녀 선수 한명이 800m, 1500m, 3000m 달리기를 석권하며 육상 3관왕이 되었다. 얼핏 보기에도 가냘프고 애처롭게 생긴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연습을 했다고 했다. 감동적인 스토리였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가난한 건 사실이었지만 라면만 먹고 뛴 건 아니라고 했다. 예나지금이나 ‘자랑스러운’ 우리의 언론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기’였다. 얼마 전 본 뉴스에 의하면 이제 그는 모수입자동차 회사의 ‘어엿한’ 영업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느닷없이 임춘애 선수 얘기를 꺼내는 건 내가 오늘 라면만 먹고 뛰었기 때문이다. 금방 배가 고팠고, 금방 지쳤고, 결국 두 바퀴를 남기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 길로 약수물 받는 곳으로 가서는 수도 꼭지를 틀어 벌컥벌컥 찬 물을 들이켰다. 그러자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수도물을 마신다는 결식아동 생각이 났다. 집에 와서는 배고품을 참지 못하고 아내가 아침용으로 사다 놓은 빵에 기어이 손을 대고 말았다.

누가 팔뚝을 이쑤시게로 찌르면 따가울 것이라는 걸 아는 건 ‘머리’로 아는 거고 실제로 따가운지 찔러보아 느끼는 건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굶으면 배고프다는 걸 머리로 아는 것과 굶어서 온몸으로 배가 고픈 건 다르다. 자꾸만 관념에 찌든 내 ‘머리통’을 아작내고 싶은 요즘이다. 아무튼지 평생에 요즘처럼 뛰어본 적이 없고 덕분에 ‘몸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Jean Grenier, 함유선 옮김,<<섬 Les Iles>>, 청.하, 1988(1쇄) 1997(17쇄)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섬 Les Iles>>, 민음사, 1997(1쇄) 2003(15쇄)

섬, 언제 들어도 참말로 거시기한 말이다. 이 말이 주는 고립과 격리의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매력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곤혹스럽다. 내가 섬인 건 참을 수도 있고 때로는 호젓한 게 즐겁기까지 한데, 다른 사람이 자기 만의 섬으로 기어들어가서는 두문불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딴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으면 그 자를 당장 그 섬에서 끄집어내어 사람들 사이에 쳐박아두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내가 섬에 들어가는 건 자발적인 유배니 내가 나올 때까지 날 꺼낼 생각 같은 건 아예 하덜덜덜 말라. 그러나 니가 섬에 들어가겠다는 건 현실도피이니, 더구나 이 부박한 삶이 피한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니 까불지 말고 그냥 여기서 사람들과 살부비며 부대끼며 아둥바둥 살아라. 그러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뭐, 내보기에 이런 식의 도둑놈 심보가 다들 조금씩은 있는 거 같다. 당신이라도 없으면 다행이고.

쳇,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내 살아보니 사람들 사이에 섬 같은 건 없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바다다. 불통과 욕망과 절망의 바다가 사람 환장하게 출렁거릴 뿐.

섬. 나에게 장 그르니에의 <<섬>>이 두 권있다. 선물받은 거 아니다. 두 권 다 내 발로 서점까지 걸어가 내 손으로 집어 들고 내 돈 내고 산 내 책이다. 하나 달라고? 택도 없는 소리!

첫 번째 ‘섬’은 88년 8월 20일에 1쇄를 찍고 97년 8월 11일에 17쇄를 찍은, 함유선이 옮긴 청.하 출판사 版 ‘섬’이다. 이 책의 책갈피에서 뒷면에 ‘피로연 장소, 신혼여행지’ 따위의 글자가 적혀있는 파란색 ‘경복궁 출장피로연 메뉴 전단지’가 나왔으니 결혼 즈음에 들고 다녔었나 보다. 솔직히 이거 읽다가 말았다. 지루해서. 나는 잘 안읽히는 이유를 번역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렸다.

두 번째 ‘섬’은 97년 8월 30일 1쇄를 찍고 2003년 11월 20일에 15쇄를 찍은, 김화영이 옮긴 민음사 版 ‘섬’이다. 번역자가 다르니 읽힐까 싶어서였고, 때마침 섬으로 휴가도 가게 된 참이라 가서 읽으리라 했다. 늘 그렇듯 여행가서는 들춰보지도 못했다. 아무려나 두번째 섬도 잘 안읽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김화영의 번역을 높게 사는 듯 하지만 두 권을 놓고 비교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 보기에는 함유선의 번역이 좀 더 시적인 반면에 문장이 호흡이 좀 거칠고, 김화영의 것은 문장이 부드러운 반면 맛은 좀 덜하다고나 할까. 어느 게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불어로 된 원서를 읽을 능력이 없으니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까뮈는 이 책에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김화영 역)”고 했으나 ─ 같은 문장을 함유선은 이렇게 옮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 ─ 난 아무래도 까뮈가 부러워할 만한 독자는 못 될 모양이다. 여전히 하품난다. 좀 더 늙어서 보자.

착불

저쪽이 ‘갑’이라서
착불로 택배받으면
금액이 많든 적든
씁쓸해지는 게 사람마음이다

하기는
사람마음이야 사람마음이고
비지니스는 비지니스니

하기는
세상에 올 때 우리도
착불로 왔나니

인생 뭐 있나
택배비나 벌어 갚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