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2013년 5월

—자본과 교회의 공통점은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느 국도변에 서 있는 교회의 십자가, 말 안 들으면 매단다고 협박하는 것 같다.

—’체’와 ‘쳇’의 중간정도 되는 발음을 들었다. ‘쳏’으로 표기하겠노라. “쳏, 당신 땜에 그래. 당신 땜에.”

—생각해보니 꽃시절이라는 말보다는 꿀시절이라는 말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문신을 새긴다면 차카게 살자, 보다는 그런가보다, 가 나을 것 같다.

—세 식구가 사는 친구는 개를 키우는데 집에 들어가면 개만큼 자기를 반겨주는 존재가 없다며 어쩌면 세 식구 모두 다 각각 개하고 자기하고제일 친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누군가의 트위터에서 ‘진리’라는 말을 읽는 순간 어떤 회한이 밀려 왔다.

—아빠, 형아한테도 포커 가르쳐 줘가지고 세 명이서 포커하자, 라고 막내가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러니까 세상에는 데카르트의 오른손 뼈를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지.

어떤 소감

2박3일 동안의 수련회에 다녀온 막내는 수련회가 어떠했느냐는 내 질문에 “규율이 엄격했어”라고만 대답했다.

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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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은 꼭 순정 주먹이 아니어도 좋다.
색도 구리고 모양도 구리지만
파워는 구리지 않다.
조막손, 이제부터 이게 내 주먹이다.
이건 내 싸움이다.

헛똑똑이

번호표를 뽑아들고 차례를 기다린다. 10여명이 내 앞에 있다. 잠깐 딴짓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새 내 차례가 지나간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친 적도 여러 번이다. 다시 번호표를 뽑아든다. 또 딴짓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번호가 호출되어 있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 번호표를 내밀면서 12345678이라고 말한다. 직원이 신분증이나 진료카드를 달라고 한다. 나는 선명한 발음으로 12345678이라고 말한다. 직원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키보드로 내가 누구인지 조회한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나처럼 스마트한 환자도 있는거라구. 직원이 고개를 들더니 그런 번호는 등록돼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다. 멍청한 병원 같으니라구. 다 귀찮아진 나는 운전면허증을 내민다. 직원은 내 주민등록번호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채혈 순서가 인쇄된 번호표를 뽑아준다. 10345678이네요, 라고 덧붙여 말하면서. 직원이, 세상엔 꼭 너처럼 잘난 척하는 인간들이 많지, 하는 거 같다. 채혈실 안에도 사람들이 많다. 하얀 가운 입고 앉아 피를 뽑는 여자들, 다 드라큐라처럼 생겼다. 주사바늘이 혈관을 파고든다. 지랄처럼 따갑다. 피같은 내 피, 참 많이도 뽑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