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경련

북적이는 밤거리를 걷다가 마주 오던 사람과 어깨를 살짝 스치는 순간, 남자는 상상 속의 여자에게, 방금 저 자식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어, 가서 혼내줘, 라고 말했다. 상상 속의 여자는, 아니, 어떤 새끼가 감히 우리 오빠 어깨를 쳐, 너 오늘 제삿날이야, 하면서 죄없는 행인을 쫒아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당황한 듯, 남자가 여자를 말리는 시늉을 하자, 여자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간 행인을 향해 애써 씩씩거리며, 애써 분을 삭이는 시늉을 하며, 너 오늘 운좋은 줄 알어, 우리 오빠 건드리고 무사한 놈은 네가 처음이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리에는 상상 속의 여자가 없고 그래서 남자는 조금 외로워졌다. 남자가 그렇게, 짧은 경련을 앓아내는 사이에 일행은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그리운 쇼핑몰

“아무개님 주문이 발송되었습니다!!-Kxxxx SHOP”

이건 내가 방금 받은 문자야. 나는 그 발상의 참신함과 그 표현의 간결함에 정녕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남들은 다 상품을 발송하는데 이 쇼핑몰은 워매 주문을 발송하나봐. 그까짓 송장번호 따위야 개나 물어 가라지.

그리운 쇼핑몰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직막 주문이 된다 할지라도 느낌표도 두 개나 받았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메모

다음은 어떤 영화의 대사이다.

“꿈을 하나 꿨었는데요…
그림이 있었어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그림이었어요.
작은 마을에 비탈길이 나 있는데
양 옆으로는 집들이 서 있고
뒤로는 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샤갈의 그림이니?”
“샤갈은 아니예요. 빨간 벽돌로 지어진 높다란 교회였어요.”

아마겟돈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어느 영화 채널에서 해주는 아마겟돈을 보고 있다. 심심한 일요일이다. 애들 데리고 어디 강원랜드라도 가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 에버랜드도 가 봤고 서울랜드도 가 봤으니까 남은 랜드는 강원랜드 밖에 없다는 말씀. 그건 그렇고.

영화를 보는데 하릴없는 무사의 여신께서 오셔서 영감을 나눠주신다. 나는 옆에서 한심한 영화를 심심하게 보고 있던 한심한 아들에게 묻는다. “엄마가 어디 가서 돈을 많이 가져 왔어. 그게 무슨 돈인지 알아?” 녀석이, 내 느닷없는 질문에 아빠가 갑자기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냉큼 답을 말해버린다. “아마 곗돈.” 농담이 썰렁할수록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이다.

녀석이 나를 쳐다 본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막내는 옆에서 특유의 표정으로 아, 그러세요, 한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농담을 못알아 듣다니. 자부지불온이면 불역부호아.

아니다. 나에겐 희망이 있다. 나에겐 딸이 있다. 딸이 빵 터진다. 빵 터져서 부엌에서 낮설거지를 하느라 내 브레이크스루한 농담을 놓친, 지 엄마에게 달려가 나의 위트를 전한다. 물론 아내의 반응도 아들녀석들과 비슷하다. 아내부지불온이면 불역남편호아. 도, 개, 걸, 윷, 모, 다 좋지만 딸이 최고. 딸 나와라.

저 갸륵한 여식이 내 농담을 듣자마자 내뱉은 말을 이 시점에 아니 기록해 둘 수 없다. “아빠는 정말 똑똑한 거 같애.” 용돈 인상해 줘야겠다.

*****
이상, 새벽 두 시에 스팸 문자 받고 잠에서 깨어 쓴다. 퇴고와 교정은 나중에. 스팸 문자 보낸 새끼도 삼대가 불면증에 시달리기를.

더 다정한 가족

일요일에 친구 따라 청담동 간다는 딸이 아내에게 용돈을 달라하자 아내가 아빠한테 가서 받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전 아내에게 고작 5만원을 빌렸는데 엊그제 딸 버스비로 1만원을 대신 주었으므로 현재 남은 빚은 무려 4만원인 것이다. 온다, 저기, 딸이. 빚 받으러 온다.

아빠, 만원 줘.

내가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

없다. 아빠 팔아 가져.

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엄마에게 가서 이른다.

아빠 팔아서 가지래. 어디다 팔아야 좋을까?

이때다. 틀림없이 안방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을 막내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린다.

글쎄? 장기매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