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60

어쩌다가 “환경정비용마대”가 된 전직 플래카드가 한때 자신이 세상에 대고 발음했던 자모음들을 50리터 들이 내면에 구겨넣은 채 가엾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07-060 버스 정류장

아빠의 본분

나는 본의 아니게 아빠다. 귀찮지만,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아빠는 뭐 좀 먹을 건데 넌 어떻게 할래?”

“난 짜파게티 먹을래.”

“그러자. 그럼 지금 두 개 끓인다.”

“지금?”

“응.”

“난 지금 씻을 건데…”

“그럼 씻고 나서 니가 끓여, 두 개.”

“그래.”

이로써 나는 배고픔도 해결하고, 귀찮음도 면하고, 아빠 노릇도 다 했다.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텍스트

즉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어떤 “저 바깥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원자”를 의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흐의 푸가나 몬드리안의 그림들과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진리적”이고자 한다. 즉,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정합적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어떤 놀라운 미학적.인식론적 문제가 제기 된다 : 도대체 텍스트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사태와 정합적인가? —p. 54

즉 신문의 내용 중 한 부분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나머지의 대부분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신문에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신문에 글쓰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도서관들을 위해 쓰고, 다른 부류는 쓰레기통을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신문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적합한 신문과 그 대부분이 휴지통에 적합한 신문. —p. 207

—빌렘 플루서(지음), 윤종석(옮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문에출판사, 2002(1판 3쇄), p.54

실신

나는 환장해본 경험은 몇 번 있지만 그게 다다. 환장을 넘어 실신까지 가본 적은 없다. 실신은 이를테면 내 괴로움을 과장하는 하나의 이미저리였을 뿐이다.

청소년기에는 어머니가 까무러치시는 걸 본적이 있다. 사지가 마비되고 눈동자가 돌아가던 어머니를 주무르던 기억이 난다. 우황청심환이라는 약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았다.

화장장에서 고인의 관이 화로로 들어갈 때 그걸 지켜보다가 힘없이 무너져내리던 어떤 누나 생각도 난다. 혀가 말려 기도를 막지 않도록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어제 딸아이가 학교에서 실신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사는 혈관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병명을 진료확인서에 적어주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명을 검색해본 아내는 그 약이 향정신성 약물이라고도 했고 수면제라고도 했다.

유튜브에서 산울림의 회상을 여러 번 들었다. 임지훈 버전으로도 듣고 <또하나의 약속>에 나온 여리목 버전으로도 들었다. 혼자 어쩔 수 없었다. 미운 건 오히려 나였다.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친구는 관계의 이름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물과 술과 안주와 위산과 위장과 식도를 치욕처럼 토하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봄밤, 책상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떨어져 한 장 낙엽으로 방바닥에 뒹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