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미 전쟁

내가 몸소 직접 친히 씻어 불려 놓은 백미에 아내가 흑미를 섞어 놓았다. 내 마음은 영혼까지 까매졌다. 전쟁이다.

창가에서

지근거리에 목련꽃이 피고
유리창마다 바람이 불었다
여자는 검은 외투를 벗고
창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펼쳐놓은 지면에서는
스파게티가 굴욕적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창문을 닫아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남자는 다른 자리로 옮겨 앉지도 못했다
유리창마다 바람이 불고
여자는 스파게티에 얼굴을 박은채 흐느끼고
창밖의 나무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남자는 추웠다

‘or’의 포괄적 의미와 배타적 의미

“여기에는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이거나(or)’하는 단어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보통 ‘p거나 q다’는 p와 q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참이거나 둘 다 참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거나’라는 단어의 ‘포괄적’ 의미라고 불린다. 논리학에서는 보통 이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때로 ‘이거나’를 ‘배타적’ 의미로 쓰기도 한다. 즉 ‘p거나 q다’는 p와 q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참이지만 둘다 참은 아니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육로로 오거나 해로로 올 것이다’는 그들이 동시에 육로와 해로로 오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이 경우는 만일 그들이 어느 한 길로 온다면 다른 길로는 오지 않는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선언 삼단논법은 ‘이거나’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에 상관없이 타당하다. 검토해보라. 그러나 ‘p거나 q다’와 같은 진술에서 추론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구체적인 ‘p거나 q다’라는 전제에서 ‘이거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에 달려 있다. 당신이 p를 알고 있을 때 ‘q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여부를 가릴 때 특히 그렇다. 이 점을 주의하라!”

—앤서니 웨스턴(지음), 이보경(옮김), <<논증의 기술>>, 필맥, 2009(1판 14쇄),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