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몇 개

네버 세이 네버, 라고 말했던 자는 저 스스로가 네버, 라고 두 번 말했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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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건 돋보기가 아니다. 돋보기 너머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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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다녀온 아내가 남자들은 도대체 왜 조준을 잘 못하느냐고, 찌린내가 나서 못살겠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우리집 남자들이여, 부디 조준 좀 잘하기 바란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특수부대 저격병 출신으로, 서서쏴 자세로 400미터 전방의 변기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준이 아니라 자세다.

거리에서

거리를 지나는 젊은 엄마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아이에게 묻는다.
“칠(!) 더하기 사느은(⤴)?”
아이가 대답한다.
“십일.”
날은 후덥덥덥덥(‘텁’이 아니다)지근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날씨와 무관하게 환하다.
나는 저 총명한 아이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총 몇 번인가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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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이번 여름휴가는 4대강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니 덧붙여 둘 말이 있다.
“니가 가라, 4대강.”

착한 일

오늘도 난 착한 일을 했다. 카운터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도서관 사서를 킥킥거리게 만들어 주었다. 그 사서가 저렇게 재미 있는 남자 있으면 당장 시집가겠다, 고 생각하는 게 내 눈에 보였다. 내가 궁예 형한테 배운 관심법으로 다 봤다. 물론 그 사서는 뭘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를렌느 과자를 치사하게 혼자 다 먹었다. 마르렌느 과자를 치사하게 혼자 다 먹던 마르셀 프루스트가 지가 어려서 먹었던 그 “과자 때문에 되살아난 이미지, 시각적 기억이, 이 맛의 뒤를 따라 내 자아에까지 이르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게 역시 내 궁예적인 멘탈 애꾸눈에 뻔히 보였다.

나는 오늘 오이소배기 속 양념 부추 먹다가 어떤 기억이 목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켁켁, 거렸다. 나는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 그 기억이 부추 맛의 뒤를 좇아 내 오장육부적인 자아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내일은 또 무슨 착한 일을 할까.

며칠 전 식탁 머리에서 아이들에게 해줬던 얘기인데 나중에 또 써먹으려고 에버노트에서 여기에 꺼내둔다.

“실제로 상대적인 크기까지 고려해서 태양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교과서에 여러 쪽을 펼칠 수 있는 면을 만들거나, 폭이 넓은 포스터용 종이를 사용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상대적 크기를 고려한 태양계 그림에서, 지구를 팥알 정도로 나타낸다면 목성은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야만 하고, 명왕성은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야만 한다(더욱이 명왕성은 세균 정도의 크기로 표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pp.3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