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도 나다

나는 아침마다 두 번 저울에 오른다
똥누기 전에 한 번
똥 눈 다음에 한 번
나는 내가 꺼낸 똥만큼 가벼워진다
똥도 나다
나는 똥을 많이 많이 싸고 싶다
나는 어서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그러나 나는 똥누지 못한다
아침마다 내 몸에서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내가 빠져나가 변기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똥은 남아 몸이 되고 삶이 되고 치욕이 된다
아침마다 한 가마니의 똥이 저울에 오른다

태풍전야

자식 다 키웠다, 이제. DVD 빌리러 다녀오는 길에 누가바 사다가 상납도 할 줄 안다.
“뭐 빌려 왔느냐?”
“마이 웨이요.”
제목을 들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나는 기다렸다가 졸라맨인지 볼라벤인지 태풍 구경이나 해야겠다.
“가서 니들끼리 보거라.”
“네.”
하드를 한 입 베어문다. 맛있다. 북경원인 뇌수 맛이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난다. 누구냐, 내 방문 앞에 와서 선 너는? 딸이다.
“아빠, 저 누가바 한 입만 주세요.”
아깝지만 줬다. 딸은 내 누가바를 양심적으로 한 입 깨물고 돌려준다. 생각해보니 딸에게도 제 몫의 누가바가 있었을 거 같다.
“너 니 꺼 다 먹고 아빠 꺼 뺏어 먹는 거냐?”
“응.”
“왜?”
“나는 공평하니까. 내가 쟤들 것도 한 입 씩 뺏어 먹었거든.”

이렇게 대답하며 녀석은 쪼르르 가버렸다. 나는 헐, 소리조차 하지 못했다.

지렁이

어쩌자는 것인가 천둥번개 치며 비 오는 새벽 검은 지렁이 한 마리 젖은 아스팔트 위를 (           ) 기어가고 있다 거리의 흔한 청소년이라면 저 괄호 안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존나 병신 같이, 라고 넣을 것이다 지렁이 자신은 어떤 부사를 써서 자신의 실존을 기술할 것인가 가령 묵묵히, 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소신 있게, 라고 할 것인가 비 내리는 새벽 세 시 담배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지렁이에게 나는 어떤 수식어를 헌정해야 하는가 내 머리에 최초로 떠오른 단어는 지렁이가 아니라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말이 이 글의 주제인데 나는 정작 그 치명적인 언어는 쓰지 못하고 있다

메모 몇 개

네버 세이 네버, 라고 말했던 자는 저 스스로가 네버, 라고 두 번 말했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답이 없다.

***
필요한 건 돋보기가 아니다. 돋보기 너머의 텍스트다.

***
화장실에 다녀온 아내가 남자들은 도대체 왜 조준을 잘 못하느냐고, 찌린내가 나서 못살겠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우리집 남자들이여, 부디 조준 좀 잘하기 바란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특수부대 저격병 출신으로, 서서쏴 자세로 400미터 전방의 변기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준이 아니라 자세다.

거리에서

거리를 지나는 젊은 엄마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아이에게 묻는다.
“칠(!) 더하기 사느은(⤴)?”
아이가 대답한다.
“십일.”
날은 후덥덥덥덥(‘텁’이 아니다)지근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날씨와 무관하게 환하다.
나는 저 총명한 아이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총 몇 번인가 묻고 싶어졌다.

***
그분께서 이번 여름휴가는 4대강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니 덧붙여 둘 말이 있다.
“니가 가라, 4대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