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앞으로 도로에서 다른 차가 내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운전을 하면, 아 새끼 또… 호수같은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네, 하고 말겠다. 저 대사는 만화가 김보통의 D.P 개의 날, 에서 본 것이다.

아, 오늘은 또 어떤 자식이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려나. 어저께 너 소나타 운 좋은 줄 알어.

아침 대신 먹으려고 단호박을 쪘는데, 이건 뭐, 당췌 뭐, 단호박이 아니라 맹물호박이네.
너 이놈의 호박 새끼, 이 여름에 광합성한 당분 다 어디다 꼬불쳤어. 응. 엉.

언어가 덥다

김애란의 소설에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이 반복 되는 게 있다. 제목은 잊었다. 편의점 어쩌구 했던 것도 같고 아닐 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을 흉내 낸다. 표절이다. 방금도 그랬다. 아내가 세탁기 안의 빨래가 다 내 꺼라고, 날더러 널라고 그러고 외출을 하고 난 뒤, 빨래를 널다보니 오우 마이 갓, 내 것이 아닌 빨래가 섞여 있는 거다.

아니 내 빨래 아닌 게 있는데 왜 다 내 꺼라 그런 거야, 아 내 빨래가 대부분이라는 뜻이었구나. 아내가 처음부터 그런 뜻으로 말한 걸 내 몰랐던가. 그럴리가. 나는 언어가 괴로운 사람이다. 나는 언어가 덜 자란 사람이다. 나는 피곤한 사람이다.

나라

새삼스럽지만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다. 6월 23일, 문제의 ‘그 병원’에 진료예약이 되어 있다. 때가 때이니 만치 한 달 뒤로 미루려고 ‘그 병원’에 전화를 건다.

통화 불가. 전화가 많아 통화가 불가하다, 잠시 후 다시 걸어 달라, 고 기계가 답하며 기계가 전화를 끊는다. 아쉬운 건 나니까 기계가 시켜도 군말 없이–사실 군말을 해도 들어줄 기계도 사람도 없으므로–잠시 후 다시 건다. 잠시 전과 달라진 게 없다. 통화 대기음 듣다가 통화 불가. 때가 때이니 만치 통화 불가. 기계가 응답하는 똑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듣느라 얼마 되지도 않는 내 한 달치 음성 통화 시간의 절반을 써도 통화 불가. 통화 불가. 통화 불가. 포기. 이게 오전 상황이다.

오후에 다시 시도한다. 마찬가지다. 달라진 게 없다.

맞다. 어플이 있었다. 나는 뒤늦게 스마트한 생각을 떠올린다. 앱스토어에서 병원 어플을 검색해서 설치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회원가입, 더 내키지는 않지만 주민등록번호 입력. 회원 가입창 양식에 슬쩍슬쩍 들어 있는, 문자 수신 동의, 메일 수신 동의 따위의 칸 집요하게 선택 해제. 가입 완료. 드디어 로그인, 진료예약 변경 페이지 추적, 드디어 예약 변경 시도. 

“동일과 내 진료예약 변경은 사전에 전화 문의하여 주십시오.”라는 멘트와 함께 전화 번호가 나와 있다. 훌륭한 어플이다. 어플에 나온 번호는 내 진료카드에 적힌 대표번호나 예약번호와 다른 번호다. 직통번호인가 보다. 건다, 전화.

통화 안 된다. 뭔가. 이게 뭔가. 다시 한 번 건다. 가까스로 연결 된다. 눈물이 다 난다. 그런데,

헐.

전화 받으신 분 하시는 말씀. 자기는 해줄 게 없으니 전화 번호를 하나 알려줄테니 그쪽으로 전화하란다. 그 번호는 내가 지금까지 통화하려고 무수히 걸었으나 통화하지 못했던 바로 그 번호다. 뭐지? 돌고 돌아 제자리다. 뫼비우스의 띠인가? 그러면 그렇지.

역시 역병이 창궐하는 아름다운 나라의 초일류병원 답다.

전화에 대고 나는 다시 설명한다. 여차저차 하다. 나 전화 할 만큼 했다. 그런데 나더러 전화를 받을 때까지 죽어라 전화를 걸라는 말이냐, 니들은 웨이팅 리스트도 없냐, 오늘 18시 지나면 그나마도 전화 업무 종료할 거 아니냐, 오늘 성공 못하면 내일 전화 걸고, 내일 성공 못하면 모레 걸고, 그렇게 걸고 또 걸라는 거냐. 이렇게 말한다. 구차하다.

담당 직원은 죄송하다는 말만 한다. 아마 그는 내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죄송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되겠다. 나도 못 물러 선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나는 상급자를 바꿔 달라고 요구한다. 누구요? 당신의 보스와 통화 하고 싶다. 안 되면 보스 찾는 거, 나쁘다. 아, 나 새끼는 나쁜 새끼, 우, 또라이 새끼 나 새끼. 그는 기다리라 한다.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또, 따 다다 다다다다단, 따 다다 다다다다단, 하고 음악이 나온다. 기다린다.

마침내 누가 여보세요 한다. 그는 좀 전에 전화 받은 자신의 아랫직원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에이, 여보슈.

그러니까 저더러 그 번호가 전화 받을 때까지 전화하라구요? 오늘 하다 안 되면 내일 하고, 내일 하다 안 되면 모레 하고? 그렇게 될 때까지 하라구요? 그게 말이 돼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웨이팅 리스트 만들어서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쪽에서 전화 걸 수 있을 때 전화 걸어주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자 그는 지금 당장 피드백 전화를 드려도 되는 게 아니라면 자기가 메모를 전달해 주겠단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그게 원칙상 메모를 전해주는 게 안 되지만 내가 하도 ‘지랄을 해대니까’ 귀찮아서 메모를 전해주겠다는 거냐, 고 묻는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그런 게 맞는 거 같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랄을 해야한다.

어쨌든, 이리하여, 병원님, 귀측에서 시간이 나실 때 모쪼록 이 못난 환자한테 전화 좀 해주십시오. 오늘이든 내일이든 모레든 소인은 그저 전화만 걸어주시면 황공하옵니다요, 라는 진료예약변경 요청 메모를 전달. 이게 뭔가.

그러고 이십 분 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진료예약변경 해준단다. 고맙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아니하다.

책상 정리

책상 위에 잡다한 물건들이 너무 많다. 읽고 쓰는데 필요한 것만 빼고 다 버리자. 개뿔. 꿈같은 얘기다.

앞으로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지 않고 작업대라고 부르겠다. 내 책상 위의 것들은 다 내 작업에 꼭,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히겠다. 아무렴.

책상 정리하지 않을 것이다. 됐다. 이제 됐다.

정신이 산만하고, 영혼이 잡다하며, 마음이 번잡한 인간은, 그에 딱 맞는, 지저분하고, 너저분하고, 잡다하고, 우우, 더러운, 그런 책상을 갖는 거다.

공구 상자

마트에서 공구 상자를 보았다 크고 좋았다 공구 상자에 들어 앉아 망치랑 마냥 놀고 싶었다 공구 상자 손을 잡고 계산대를 무사히 지날 수는 없었다 공구 상자를 두고 오는 발걸음이 오함마처럼 무거웠다 마트 가고 싶다 일산백병원 상가에 다녀온 23시 52분 집에도 공구 상자는 몇 개 있다 친구에게 얻은 프랑스제 메이크업 가방도 나는 공구 상자로 쓴다 책상 위에는 대패가 있다 상가에서 고교 동창에게 포트란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포트란이라는 단어가 반가운 사람은 코볼이라는 말도 그리울 것이다 그리운 것은 많다 마트 가고 싶다 마트 가서 공구 상자 구경하고 싶다 넋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