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호퍼(지음), 방대수(옮김),<<길 위의 철학자>>, 2014(개정판1쇄), 이다미디어

“나는 1920년 4월에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했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온상에서 빈민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저축한 돈이 얼마간 있어서 나는 1년 동안 그 돈을 쓰면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1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5센트를 주고 다량의 수산염을 샀다. 그래서 [자살]준비는 하루 만에 끝났다.”
“나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지만, 그 일요일에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태어났다.”
“나는 다시 길 위로 돌아갔다.”
“나는 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수확철이 다가오자 나는 그녀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버클리를 떠났다.”

훌륭하신 분이다. 이렇게 늘 떠나셨다. 그리고 늘 읽고 늘 쓰셨다.

“어느해 나는 산 위로 올라가야 했는데, 쌓인 눈에 오랫동안 발이 묶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이 없는 동안에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읽을거리를 충분히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1,000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책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두껍고 활자가 작고 그림이 없으면 어떤 책이건 상관없었다. 나는 헌책방에서 그런 책을 찾아 1달러를 주고 샀다. 제목에 눈을 돌린 것은 책값을 치르고 난 뒤였다. 표지에는 <<미셀 몽테뉴의 수상록 Essays of Michel de Montaigne>>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세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몽테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발이 묶일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했고, 그래서 그는 몽테뉴를 읽는다. “3번이나.” “그 책의 언어는 정확했고” 그는 “훌륭하게 다듬어진 문장속에서 독특한 매력들을 발견했다.”

날이 풀리고 하산하신 이분, 이제 입만 열면 몽테뉴를 인용하신다. “동료들도 좋아했다. 여자나 돈, 동물, 음식, 죽음 등 어떤 것에 대해서건 논쟁이 벌어지면 그들은 ‘몽테뉴는 뭐라고 말했나?라고 물을 정도였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 구절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몽테뉴는 뭐라고 말했나?” 나는 이런 장면이 좋았다.

신경망 점화

“의식적인 생각은 느리게 진행된다. 또 이것은 폭이 매우 좁은 병목을 지니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의식적인 생각을 두 가지 이상 동시에 진행하기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서 무의식적인 생각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또 이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병목 현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승자의 뇌>>>, 117쪽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에서 용각산으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로 연결된 연결은 방금 연결된 연결인가, (방금 연결된 연결인가, 다음에 순간적으로 또다른 연결이 연결되었지만 그만 연결하자.)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다음에 내가 생각했던 문장은 어디로 갔는가.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쩌면 지금도 거기 있을 거 같은데, 나는 왜 연결을 잃었는가. 왜 연결하고 싶은 연결은 연결되지 않고, 왜 연결되지 않아도 좋을 연결은 연결되는가.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일기

어제 모처에서 모 뮤지컬을 관람하고 돌아오면서 퓨어한 시리와 그 일당들께옵서 나라를 말아드시는 사이에 훌쩍 커버린 자식에게 좋았냐, 하고 물었다. 자식은 살다살다 이젠, 저보다 키도 작은 아빠한테 별 시답잖은 질문까지 다 듣는다는 듯이 당연하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어조가 퉁명스러웠던 것도 같다.

레드, 블루, 그린, 시안, 마젠타, 옐로우, 조명은 어지럽고, 혁명인가요, 오늘 밤 혁명이 시작될 거예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코젤, 나는 절대 죽지 않아요, 나를 믿어요, 대사는 낯간지럽고, 우리가 원했던 건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 새로운 역사가 아니리, 노래는 시끄럽기만 한바탕의 퍼포먼스가 좋은 게 어째서 당연한 건지, 속으로만 궁금해 했다.

고루한 나한테는 텍스트가 딱이다.

착한 일 IV

어제는 아내따라 가죽공방에 갔다가 오랜 만에 착한 일을 했다. 공방에는 아내 외에 두 명의 수강생이 더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하냥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러저런 얘기들을 했다. 젊음 여성은 친정 아버지 가방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이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아 그게 그 유명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아버지 가방이냐고, 말만 들었지 실물을 본 건 처음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착한 일은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묵묵히 바느질을 하고 있던 젊은 남성도 웃었다. 그동안 착한 일을 너무 못하고 살았다. 착한 일을 더 많이 해야겠다.

일기

오래 전에 누군가의 집에 유사-집들이 갔을 때의 기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빈 그릇들을 그집 남자가 대충 물에 헹구어서, 그러니까 건더기는 잘 떼어내고 물을 묻혀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걸 보았다. 그집 남자는 그때 초벌-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식기세척기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막내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며, 넌 공부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둥 몇 마디 붙여보다가 그냥 스마트폰이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타임라인이나 훑는다. 막내가 곧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난다. 잠시 후 나도 식사를 마친다. 오붓하기는 개뿔.

반찬, 냉장고에 넣고, 식탁, 정리하고, 행주질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그며 수저는 따로 분류해 냄비에 담고, 접시와 공기는 또 따로 대충 헹구어서 종류별로 나누어 물에 불려놓는다. 이렇게 초벌-설거지를 해두면 나중에 본격-설거지할 때 편하다. 아이들은 초벌-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문득 말 하나가 떠오른다. 식기세척기적, 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식기세척기적인 나여! 여기까지 적었는데 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괜찮다. 초벌-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좋다. 적절한 TPO에 응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똥적, 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기억도 난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시집 한 권, 소설 책 한 권. 시집은 초판이고 소설은 30쇄이다. 늘 그렇듯이 책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일기는 산만하고 주제는 없다. 따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