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오래 전에 누군가의 집에 유사-집들이 갔을 때의 기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빈 그릇들을 그집 남자가 대충 물에 헹구어서, 그러니까 건더기는 잘 떼어내고 물을 묻혀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걸 보았다. 그집 남자는 그때 초벌-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식기세척기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막내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며, 넌 공부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둥 몇 마디 붙여보다가 그냥 스마트폰이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타임라인이나 훑는다. 막내가 곧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난다. 잠시 후 나도 식사를 마친다. 오붓하기는 개뿔.

반찬, 냉장고에 넣고, 식탁, 정리하고, 행주질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그며 수저는 따로 분류해 냄비에 담고, 접시와 공기는 또 따로 대충 헹구어서 종류별로 나누어 물에 불려놓는다. 이렇게 초벌-설거지를 해두면 나중에 본격-설거지할 때 편하다. 아이들은 초벌-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문득 말 하나가 떠오른다. 식기세척기적, 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식기세척기적인 나여! 여기까지 적었는데 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괜찮다. 초벌-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좋다. 적절한 TPO에 응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똥적, 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기억도 난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시집 한 권, 소설 책 한 권. 시집은 초판이고 소설은 30쇄이다. 늘 그렇듯이 책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일기는 산만하고 주제는 없다. 따위적이다.

일기

엊그제, 딸이 친구랑 영화 본다고 예매해 달래서 해줬다. 어제 아침, 아들이 학교 동아리에서 영화 보러 간다고 영화값 달래서 줬다. 오늘 아침, 조조로 <아가씨> 보고 왔다. 예쁜 여자는 예쁘다.

조금 전, 딸이 친구랑 또 영화 본다고 예매해 달라더니, 이번에는 친구가 예매해 주었다고 했다. 엊그제 같이 영화 본 친구와 오늘 같이 영화 보는 친구는 다른 친구란다.

수육 만들었고 밥 한다. 상추 사러 슈퍼 가야 한다. 새우젓도. 어제 아내가 친정에서 강된장을 가져 왔다. 쌈 싸먹으면 맛 있을 것이다. 2010년 11월 10일의 삼악산 사진을 몇 장만 남기고 삭제했다.

라디오 듣는다. 위선자, 나다. ‘위선자’는 그러나 적확하지 않은 단어다. 바보, 나다. 근거가 없다. 베티 블루. 블루 베티.

영화 보고 오는 길에 모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구경했다. 워드프레스 아이폰 어플, 뭔가 문제가 있다. 밥 다 됐다. 상추 사러 가자. 새우젓도. 담배도. <아가씨>에서 백작이 마지막에 피운 담배, 탐난다.

휴지통 비우기

귀찮지만 커피를 내려 와, 책상 앞에 앉아,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는 컴퓨터를 깨운다. 휴지통이 보인다. 며칠 전부터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며 내버려둔 휴지통이다. 클릭한다. 열린다. 모니터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휴지통이 바탕화면에 대문짝만하게 열린다. 그래 니 세상이다, 이 놈아.

파일이 네 개 보인다. 쓸모 없는 놈들, 무용한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내 비좁은 하드디스크를 좀먹는 좀같은 놈들, 죽일 놈들. 메뉴에서 ‘휴지통 비우기’를 누른다. 대화상자가 뜨며 내게 묻는다.

“휴지통에 있는 항목들을 영구적으로 지우겠습니까? 이 동작은 실행 취소할 수 없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쓰다, 역시 직접 내리는 게 아니었다, 멀쩡한 아내 놔두고, 내가 왜, 도대체 왜, 이 몸이 왜, 왜 때문에–이 말을 나도 꼭 써보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몸소 커피를 내려야 한단 말인가, 전경련이 입금이라도 해준단 말인가,) 비우기를 실행하려다가 순간, 멈춘다. ‘영구적으로’라는 말 때문이다.

영구적인 삭제, 돌이킬 수 없는 동작, 영구적인 삭제, 돌이킬 수 없는 동작. 모종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클릭 한 번이면 죽는 세상이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쓰다, 쓰다고, 쓰단 말이야, 나는 실행 취소할 수 없는 동작을 한다. 휴지통, 닫힌다. 책상 정리 해야겠다.

2016, 봄 타임라인

다시, 봄이다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는
봄이다

생각해 보니
생각해 봐야겠다

생각해 보니
생각할 게 없다

생각해보니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쓰러진 쓰레기통을 세우고
쏟아진 쓰레기를 주어 담는다

봄이 뭐냐
벚꽃이 다 뭐냐

꽃은 시들고
언제든 어디서든
스마트폰이나 들여다 봐야겠다

비빔국수

낳아놓기는 아내가 덜컥 낳아놓았는데 뒤치닥거리는 왜 내가 해야하는 것이냐. 미세먼지 자욱한 봄날, 어쩌다가 막내하고 둘만 남아 점심 챙겨준답시고 비빔국수를 해먹인다. 녀석, 맛 있다고 먹는다. 암, 맛 있겠지. 설탕을 두 삽이나 넣었는데.

니 엄마는 해준 게 없으나 이 아빠는 네놈에게 비빔국수도 해주고 김치부침개도 해주고 칼국수도 해주고 수제비도 해주고 만두도 해준 적이 있음을 기억하거라. 니 엄마는 고작해야 카레라든가 빵이라든가 샐러드라든가 순대볶음이라든가 수육이라든가 잡채라든가 뭐 이딴 거 밖에 해준거 없다. 너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30년 쯤 뒤에 오늘을 생각하면서, 아 그때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중학교 땐가, 울 아버지하고 나하고 단둘이 있던 어느 해 봄, 일요일에 아버지가 해줬던 비빔국수 겁나 맛 있었는데, 아 먹고 싶다, 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하며 있는 생색, 없는 생색 다 내가며 비빔국수를 먹인다.

이 말에 녀석이 대답한다. 토요일인데요.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더 먹어라,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