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어제 모처에서 모 뮤지컬을 관람하고 돌아오면서 퓨어한 시리와 그 일당들께옵서 나라를 말아드시는 사이에 훌쩍 커버린 자식에게 좋았냐, 하고 물었다. 자식은 살다살다 이젠, 저보다 키도 작은 아빠한테 별 시답잖은 질문까지 다 듣는다는 듯이 당연하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어조가 퉁명스러웠던 것도 같다.

레드, 블루, 그린, 시안, 마젠타, 옐로우, 조명은 어지럽고, 혁명인가요, 오늘 밤 혁명이 시작될 거예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코젤, 나는 절대 죽지 않아요, 나를 믿어요, 대사는 낯간지럽고, 우리가 원했던 건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 새로운 역사가 아니리, 노래는 시끄럽기만 한바탕의 퍼포먼스가 좋은 게 어째서 당연한 건지, 속으로만 궁금해 했다.

고루한 나한테는 텍스트가 딱이다.

착한 일 IV

어제는 아내따라 가죽공방에 갔다가 오랜 만에 착한 일을 했다. 공방에는 아내 외에 두 명의 수강생이 더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하냥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러저런 얘기들을 했다. 젊음 여성은 친정 아버지 가방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이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아 그게 그 유명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아버지 가방이냐고, 말만 들었지 실물을 본 건 처음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착한 일은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묵묵히 바느질을 하고 있던 젊은 남성도 웃었다. 그동안 착한 일을 너무 못하고 살았다. 착한 일을 더 많이 해야겠다.

일기

오래 전에 누군가의 집에 유사-집들이 갔을 때의 기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빈 그릇들을 그집 남자가 대충 물에 헹구어서, 그러니까 건더기는 잘 떼어내고 물을 묻혀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걸 보았다. 그집 남자는 그때 초벌-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식기세척기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막내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며, 넌 공부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둥 몇 마디 붙여보다가 그냥 스마트폰이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타임라인이나 훑는다. 막내가 곧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난다. 잠시 후 나도 식사를 마친다. 오붓하기는 개뿔.

반찬, 냉장고에 넣고, 식탁, 정리하고, 행주질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그며 수저는 따로 분류해 냄비에 담고, 접시와 공기는 또 따로 대충 헹구어서 종류별로 나누어 물에 불려놓는다. 이렇게 초벌-설거지를 해두면 나중에 본격-설거지할 때 편하다. 아이들은 초벌-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문득 말 하나가 떠오른다. 식기세척기적, 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식기세척기적인 나여! 여기까지 적었는데 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괜찮다. 초벌-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좋다. 적절한 TPO에 응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똥적, 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기억도 난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시집 한 권, 소설 책 한 권. 시집은 초판이고 소설은 30쇄이다. 늘 그렇듯이 책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일기는 산만하고 주제는 없다. 따위적이다.

일기

엊그제, 딸이 친구랑 영화 본다고 예매해 달래서 해줬다. 어제 아침, 아들이 학교 동아리에서 영화 보러 간다고 영화값 달래서 줬다. 오늘 아침, 조조로 <아가씨> 보고 왔다. 예쁜 여자는 예쁘다.

조금 전, 딸이 친구랑 또 영화 본다고 예매해 달라더니, 이번에는 친구가 예매해 주었다고 했다. 엊그제 같이 영화 본 친구와 오늘 같이 영화 보는 친구는 다른 친구란다.

수육 만들었고 밥 한다. 상추 사러 슈퍼 가야 한다. 새우젓도. 어제 아내가 친정에서 강된장을 가져 왔다. 쌈 싸먹으면 맛 있을 것이다. 2010년 11월 10일의 삼악산 사진을 몇 장만 남기고 삭제했다.

라디오 듣는다. 위선자, 나다. ‘위선자’는 그러나 적확하지 않은 단어다. 바보, 나다. 근거가 없다. 베티 블루. 블루 베티.

영화 보고 오는 길에 모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구경했다. 워드프레스 아이폰 어플, 뭔가 문제가 있다. 밥 다 됐다. 상추 사러 가자. 새우젓도. 담배도. <아가씨>에서 백작이 마지막에 피운 담배, 탐난다.

휴지통 비우기

귀찮지만 커피를 내려 와, 책상 앞에 앉아,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는 컴퓨터를 깨운다. 휴지통이 보인다. 며칠 전부터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며 내버려둔 휴지통이다. 클릭한다. 열린다. 모니터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휴지통이 바탕화면에 대문짝만하게 열린다. 그래 니 세상이다, 이 놈아.

파일이 네 개 보인다. 쓸모 없는 놈들, 무용한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내 비좁은 하드디스크를 좀먹는 좀같은 놈들, 죽일 놈들. 메뉴에서 ‘휴지통 비우기’를 누른다. 대화상자가 뜨며 내게 묻는다.

“휴지통에 있는 항목들을 영구적으로 지우겠습니까? 이 동작은 실행 취소할 수 없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쓰다, 역시 직접 내리는 게 아니었다, 멀쩡한 아내 놔두고, 내가 왜, 도대체 왜, 이 몸이 왜, 왜 때문에–이 말을 나도 꼭 써보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몸소 커피를 내려야 한단 말인가, 전경련이 입금이라도 해준단 말인가,) 비우기를 실행하려다가 순간, 멈춘다. ‘영구적으로’라는 말 때문이다.

영구적인 삭제, 돌이킬 수 없는 동작, 영구적인 삭제, 돌이킬 수 없는 동작. 모종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클릭 한 번이면 죽는 세상이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쓰다, 쓰다고, 쓰단 말이야, 나는 실행 취소할 수 없는 동작을 한다. 휴지통, 닫힌다. 책상 정리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