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가루

밤에 보니 식탁 우에 콩가루가 놓여 있다.

아침이다. 사모님이 말씀하신다.

“저거 미수가루야.”

그렇구나. 콩가루인 줄 알았는데 미수가루구나.

“그래? 타줘.”

“나 어떻게 타는지 몰라. 타먹어.”

그럴 수도 있지. 미수가루 타는 법 모를 수도 있지. 나는 슬프다.

아, 내가 저따위한테 너무 야박하게 굴었군, 하고 반성하신 사모님 미수가루를 타다 주신다.

“야.”

그저, 고맙습니다, 하고 먹으면 될 걸 나는 또 묻는다.

“잘 저었어?”

이번에는 국물도 없다.

“저어 먹어.”

봄이다. 미수가루 먹는다.

아래 문자는 사이시옷용 시옷이다.

ㅅㅅㅅㅅㅅㅅ

어떤 잔해

육신에서 언어가 빠져 나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나는 늘 이런 상태를 꿈꿔 왔다. 언어 없는 의식. 그저 짐승. 그저 물질. 잔해.

2월28일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영화 한다. 엇그제 본 영화다. 이상하고 유치하고 재미 없는 영화다. 멍하니 또 본다. 지나가던, 다 커서 징그러운 막내가 묻는다.

다른 데는 뭐해?

왔다. 기회가 왔다. 왔다. 찬스가 왔다. 왔다. 카이로스가 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다른 거.

막내가 피식 웃는다. 이제 쌤쌤이다.

2월 24일

아내가 저녁 먹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신 뭔가를 먹어대는, 이제는 다 커서 징그러운 막내에게 묻는다.

아이고 우리 아들 뱃속에 뭐가 들었어?

막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내장.

오늘의 문장

“몸은 몰라도 마음만은 서로 말고는 달리 갈 데가 없으니 헤어지고 나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가 싶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김정선, 《동사의 맛》, 가다/오다 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