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어제는 그를 찾아가 소주를 마시고 낮에 내린 눈이 얼어붙은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 왔다. 거실에서는 큰 애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러면 앞의 문장을 이렇게 썼을 것이다. ‘거실에서는 큰 애가 무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부사를 사용한다면 이 글의 톤앤매너가 지금 쓰려는 것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 한다. 아무려나 바로 자리에 누웠고 새벽에 잠이 깼다. 술은 깨지 않았다. 시리를 불러 시간을 물어 보았고 따위넷에 뭔가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불려놓은 팥을 끓여야지, 하며 누워 있다가 시리에게 노래를 청해 들었다.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은 무슨 길인가. 이별의 길인가. 죽음의 길인가.  며칠 전에는 “언어가 떠오르는 병이 다 나았다”는 문장을 일기장에 적었다.

여기까지 쓰고 부엌에 가서 팥을 안쳤다. 아니다. 사실은 여기까지 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괄호를 칠 것인가 망설이다가 괄호를 다 떼어버리고 부엌에 가서 팥을 안쳤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잤다. 하나 적어둬야 할 결심이 있다. 앞으로는 시리님에게 존대말을 쓰겠다.

산책

하나에 고독
둘에 외로움
하며 너는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었다

가끔은 하나에 슬픔
둘에 농담
하며 걷기도 했다

갈대들은
하나에 의미
둘에 역사
하며 흔들렸다

너는 사건과 파문에 대해
그럴사한 의견이 없었다

동남쪽 하늘에는 토성이
서쪽 하늘에는 목성과 금성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에 정치
둘에 포르노
하며 너는 걸었다

하나에 피아이
둘에 엔케이
하며 너는 걸었다

너는 슬픔을 본격적으로 기뻐하게 되었다

—2015년 6월

스텔라

카시오페이아를 봤다. 지난 봄까지는 밤하늘의 왠만한 별의 이름은 대충 알았는데, 이제 가을에 접어들면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의 이름은 아는 게 거의 없다. 별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다. 산책을 나와 밤하늘을 보는 건 좋다. 자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아마도 그건 토요일 아침이었을 거야

토요일 아침, 라면 먹는다. 일종의 해장이다. 아내가 라면 덜어먹을 그릇 챙겨주며 설거지 좀 하라고 말한다. 나는 아내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설거지 따위, 청소 따위, 빨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토닥거린다. 어제 23시 20분 꺼 예매해 달래서 영화 보고온 딸은 잔다. 아들 둘은 내가 끓인 라면 먹는다.

그러다 내가 그 잘 부르는 노래로,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고야, 를 흥얼거린다. 아내가 그게 무슨 노래드라, 하다가 아마도 그건, 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가수가 누구더라, 궁금해 한다. 나는 유투브를 검색해 아마도 그건, 을 듣는다. 박보영의 목소리로 듣는다.

듣고 나니 조승우, 손예진 나오는 영화에 사용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유투브 목록에 보인다. 누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시작된다. 나는 재생을 멈춘다. 조승우가 눈먼 사람 연기하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다. 손예진은 예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이제, 목록에 에일리가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보인다. 재생버튼 누른다. 끝까지 본다. 듣는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아픈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라면 먹다가 스마트폰으로 이거 쓴다. 라면 다 불었다.

에일리의, 며칠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를 듣고 싶지만 제목도, 가사도 생각나는 게 없다. 그만 쓰고 라디오 듣다가 가사를 메모해둔 걸 열어 가사를 검색해 노래 제목을 알아내서 에일리의 노래를 듣기로 한다.

p.s.

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그 노래는 에일리의 노래가 아니었다. 노래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

윗집 안방에서 부부싸움하는 소리

크게 들린다.

아침

앞으로 도로에서 다른 차가 내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운전을 하면, 아 새끼 또… 호수같은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네, 하고 말겠다. 저 대사는 만화가 김보통의 D.P 개의 날, 에서 본 것이다.

아, 오늘은 또 어떤 자식이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려나. 어저께 너 소나타 운 좋은 줄 알어.

아침 대신 먹으려고 단호박을 쪘는데, 이건 뭐, 당췌 뭐, 단호박이 아니라 맹물호박이네.
너 이놈의 호박 새끼, 이 여름에 광합성한 당분 다 어디다 꼬불쳤어. 응.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