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내 몸이 무섭다. 모든 욕망의 본거지다.
2.
나는 정신이 아니다. 몸이다. 지금까지 몇 십년을 ‘정신’에 투자했지만 남는 게 없다. 정신분열의 언어와 잡다한 지식과 내면에서 가파르게 출렁거리는 자의식. 이딴 거 전혀 쓸 데 없다. 그나마 이것도 최근에 뛰어보고 깨달은 것이다.
3.
投身,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나를 던져버리는…
1.
나는 내 몸이 무섭다. 모든 욕망의 본거지다.
2.
나는 정신이 아니다. 몸이다. 지금까지 몇 십년을 ‘정신’에 투자했지만 남는 게 없다. 정신분열의 언어와 잡다한 지식과 내면에서 가파르게 출렁거리는 자의식. 이딴 거 전혀 쓸 데 없다. 그나마 이것도 최근에 뛰어보고 깨달은 것이다.
3.
投身,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나를 던져버리는…
(교도소에 신참이 들어오면 ‘족보따먹기’를 하는데, 긴 시간을 들여 ‘계보’를 고증하는 까닭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허풍을 단속하기 위해서이며, 허풍에 의해 위계질서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생각해 보라, 새파란 신출내기가 감방에 들어와서 ‘가오’를 세운답시고 “나, 양은이파 직계요!”라고 우기면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 장정일의 독서일기 2, 미학사, 1995
족보를 새로 만든다고 한다. 원래는 안되는 거였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여자들과 사위들까지 올린다고 한다. 하더니 내 아내의 호적등본까지 내라한다. 썩 내키지는 않으나 ‘어른들’이 하시는 일이니, 내 아버지 체면도 있고 해서 그냥 꾹 참고 호적등본을 떼서 보냈다. 했더니 이번에는 아내의 출신학교 등 이딴 거를 적어 보내란다. 안 보내고 있다. 적어 보내면 이번에는 아내의 졸업증명서를 내라할지도 모른다.
대체 뭐하는 짓이냐 싶다.
불 밝혀라 어두운 이름들아
스스로 쪽팔지 않으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
저마다의 몰골로 불을 밝힌
저 형형색색의 이름들을 보면
쪽팔리는 이름 하나 내 걸지 못한 채
어영부영 지나가는 내 생이
나는 또 쪽팔리다
이번 생은 파투다
어디 가서 아주 짱 박혀 버려야겠다
오늘밤에도 간판이 바람에 스치운다
─ Canon EOS Rebel, EF 35~80mm 1:4~5.6F, Fuji Superia 200
박파랑 지음, <<어떤 그림 좋아하세요?: 어느 불량 큐레이터의 고백>>, 아트북스, 2003
그러니까 나도 부모는 부모여서 내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는 하는 것이다. 고민이라고 해봐야 ─ 아이의 재능유무는 차치하고서 하는 얘긴데 ─ 가령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리면 어쩌나. 나 레슨비 댈 능력 없는데…그래도 부모가 되어가지고설랑은 아이 뒷바라지는 해주어야하니, 저런 덜컥하는 때를 대비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지. 그런데 뭐해서 떼돈을 벌지.”하는 정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이런 류의 고민은 그 ‘내용’은 별거 아니지만 그 ‘해결책’은 지난한 법이니, 당장 해결될 기미도 없는 쓸 데 없는 고민은 뒤로 미루고, ‘내용’있는 고민을 좀 해보기로 하자.
요즘 많이 하는 인사 중에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말이 있다. <<아하, 그 말이 그렇구나>>라는 책에 보니, 사람이 어떻게 하루가 되느냐면서, 그건 하루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면서 저 문장이 문법적으로 잘 못된 문장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앞으로는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의미를 의미하고 싶을 때는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말하지 말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사용하기 바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써도 뭐라 그러는 사람 없다.
객쩍은 소리 그만 하고 지금 내가 주목하고 싶은 동사는 ‘되다’이다. “넌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넌 이 다음에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등과 같은 문장에서 사용되는 ‘되다’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되다’라는 말을 가장 어렵게 사용한 사람은 들뢰즈인데, 그가, 혹은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슨무슨되기’는 도대체가 뭔 말인지 통 이해가 안 되고 이제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니 ─ 한때는 <<천개의 고원>>까지 읽어가며 들뢰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었으나 이제는 포기해 버렸다. 막말로 이해 못하면 좆 된다면 나는 순순히 좆 되겠다. ─ 나는 그냥 ‘웅녀가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라든가 ‘나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작가가 될거야’하는 문장에서 사용되는 ‘되다’처럼 ‘되다’를 사용하련다. 아무튼 ‘되다’가 문제다. 너도 나도 무엇인가가 되려고 머리 싸매고 공부하고 박 터지게 싸우고 그런다. 차라리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이 미덕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 나는 내 딸아이가 미학과를 갔으면 좋겠다. 미학과를 나와 큐레이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맞다. 이거, 나는 늦었으니 자식을 통해서라도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얄팍하고 얍삽하고 속물적인 태도 맞다. ─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어려서 내 꿈은 과학자였다. 화가라든가 큐레이터라든가 하는 꿈은 꾸어본 적도 없다. 물론 재능도 없었고. ─ 물론 큐레이터가 되려면 꼭 미학과를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니, 딸아이에게 미학과를 가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또 이 책의 뒤표지에 있는 “큐레이터가 우아해 보인다고? 현장에서 일해봐, 완전히 ‘노가다’야!”라는 정도의 인식은 진즉에 가지고 있었으니 큐레이터가 되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다. 강요한다고 따라주지도 않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어느 불량 큐레이터의 고백’이라는 부제의 ‘불량’이라는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진다. 헌사부터 지은이의 ‘불량’스런 성격 드러난다. “지랄맞은 성격을 물려주신 엄마와 게으름을 물려주신 아빠께 이 책을 드린다.”
갑자기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문체를 빌어 얘기하자면 ‘이 책은 읽을 만하다.’ 개인적으로(라고까지 말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이미 이 독후감 자체가 개인적인 독후감이니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렇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에 돈을 쓴다. 취향은 생김새만큼이나 개개인에게는 고유한 것이므로, 그런 만큼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취향 때문에, 그 안목 때문에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술품 구매는 자신과 남을 구별하는 방식이고 그 차별을 문화적으로 합리화하는 장치이다.” <<한국의 부자들>>에 나오는, “정확히 중심에 알을 박아야한다.”고 부동산 재개발 정보를 알아내 땅을 사두었다가 폭리를 취하는 ‘알박기’의 노하우를 가르쳐주던 부자도 이런 취향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