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구경꾼, 행인

밤 12시가 가까워오는 늦은 시간, 공원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주유소앞 횡단보도에 1톤 화물트럭이 정지선을 넘어 멈춰서 있고, 학원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것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팔꿈치를 만지고 서있다. 중년의 커플 2쌍이 그 둘을 애워싸고 있다. 사고가 난 모양이다. 운전자는 술을 마신 듯,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이 멀뚱멀뚱 서있다. 신호가 몇 번 바뀌는 동안,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구경을 하고 있다.

운전자가 차 뒤쪽으로 돌아가더니 슬금슬금 운전석에 앉는다. 모지? 나는 나도 모르게 화물차 앞을 막아 선다. 운전자는 “당신은 뭐야?”하면서 시비다. 물러설 내가 아니다. 한껏 예를 갖추어 내가 말한다. “저는 사고순간을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드릴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선생님께서 운전석에 앉아 차를 이동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 합니다. 더구나 술까지 드셨다면서…” 운전자는 “지금 나하고 싸우자는 거요?” 하면서 몇 초간 나를 노려보더니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아이의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아이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는 했지만 경황이 없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아줌마 한 명이 말한다. “보행신호에 그랬어요. 무조건 운전자 잘못이예요” 운전자가 말한다. “내가 내 주민등록증도 주고 차번호도 적어 줬어요.” 아이의 엄마는 계속 “어떻하면 좋아.”를 연발한다. 내가 나선다. “저는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지나가던 길이라 도움이 안될 거구. 우선 여기 계신 분들 연락처를 받아 두세요.” 그때서야 엄마는 아이에게 필기구를 건네받아들고 목격자들의 전화번호를 묻는다.

나는 운전자 몰래 114에 전화를 걸어 가까운 경찰서의 전화번호를 묻는다. 잠시 후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기 주유소 앞 횡단보도 인데요. 화물차가 정지선을 넘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학생을 쳤습니다. 차량번호는요. xxxx번이거든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주시는 분은 누구세요.” “아, 저요. 공원에서 운동하고 집에 가는 길인데요.”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제 번호 거기 안뜨나요?” “네, 이 전화는 안뜹니다.” “어쨌든 저는 사고순간을 보지 못해서 도움이 안될 것 같구요. 지금 거기서 멀지 않으니까 빨리 좀 와보세요.”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구 나는 현장을 목격한 중년의 남자에게 조용히 말한다. “제가 경찰 불렀으니 곧 올겁니다. 그때까지 잘 잡아두세요.” 그리고 신호가 바뀌자 나는 현장을 떠난다. 잠시 후 C3 순찰차가 현장에 도착하는 걸 먼 발치에서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게 지금부터 1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다.

***

나는 왜 이 따위 일에 중뿔나게 나선 걸까. 앞으로 그 운전자가 겪어야 될 고초를 생각하면, 그도 분명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빠일텐데, 미안하기도 하다. 그 동안 그 횡단보도를 건너 다니면서 파란불에 슬쩍슬쩍 지나다니는 모든 차에 대한 원망이 일순간에 표출된 것일까. 아무튼 기분이 영 찜찜하다.

마지막 활주로

노인은 경찰서 정문 앞에 서있는 버스 안에 죽어있었다 노약자보호석에 앉아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힌 채였다 검은 뿔테안경이 그의 이마까지 흘러내렸다 응급차가 달려오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그의 눈꺼풀을 들추고 눈동자를 살폈지만 그는 이제 빛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들것에 누워 마지막 수속을 밟으러 어딘가로 실려가고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속도를 늦추었던 차들은 다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서둘러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한국항공대학교 앞에는 <활주로>라는 이름의 당구장이 있다 나는 당구대 위를 활주하는 당구공을 생각한다 당구공은 어쩐지 온몸에 가시가 꽂힌 채 내면을 향하여 잔뜩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를 닮았다 고슴도치여 얼마나 빠르게 달려야 우리는 날아오를 수 있는가 이 임계점만 지나가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은가

안개 모텔

지난 밤부터 12시간 동안 지속된 안개가 정액처럼 끈적끈적하게 온 몸에 엉겨 붙는 아침, 안개 묻은 스타킹을 신은 여자의 뾰족구두가 안개 묻은 보도블록 위에서 또각거릴 때마다 여자의 발뒤꿈치에서 안개가 피자치즈처럼 쭈욱 늘어났다가 힘없이 툭, 툭, 끊긴다 안개는 차츰 금이 가기 시작하고 각자의 기분이 끈적끈적한 아침 안개 모텔의 302호쯤에서 시작된 어떤 균열이 금세 아침 전체로 번진다 안개는 자동차유리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진다 안개 묻은 사람들은 옷섶에 묻은 안개를 털어내며 각자가 기다리던 각자의 버스를 타고 각자의 기억의 습지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떠나는 버스 안에도 안개는 끈적거리고 입 안에도 안개는 끈적거리고 인생은 자꾸만 안개 쪽으로 문이 열린다

아내여, 응징대상자 명단, 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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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분지님, 1차 술값 내 주신 분임. 약하게 다뤄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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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식이님, 따위 재워주신 분임. 살살 다뤄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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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69님, 술먹자고 처음에 꼬득이신 분. 심하게 다루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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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따위, 애 셋 아빠임. 앞으로 설거지 열심히 하고, 똥기저귀도 열심히 빨겠음.

p.s.
마분지님 사진은 본 따위가 찍고, 나머지 사진은 마분지님이 찍음.
역시 기본 나가리가 있으신 분이라 그동안 따위가 찍은
저 따위 사진들하고는 그 “품격”이 다름.
따위, FM2 카메라 엿 바꿔 먹어야 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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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엽 作, <새, 지렁이를 잡아먹고 있는>,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