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도 “쓰네”
………………………”아”
………………………”아”
………………………”라”
………………………”아”
………………………”아”
………………………”아”
“장님처럼”……”더듬거리며”…………
다 썼네
“사랑을 잃고 나”도 “쓰네”
………………………”아”
………………………”아”
………………………”라”
………………………”아”
………………………”아”
………………………”아”
“장님처럼”……”더듬거리며”…………
다 썼네
아침이다. 나는 잔다. 지난밤에도 나는 지구방위사령부와 연락을 취하며 지구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늦게 잠들었다. 그러니 아침이 와도 나는 잔다. 그래야 오늘밤에 또 지구를 지킨다. 예전에 지구를 지키던 동료들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지구를 지켜라”가 흥행에 실패해서 그런 모양이다.
아무튼 아침이다. 나는 잔다. 아내는 나에게 터미네이터 원을 파견한다.
__언아, 아빠 깨워.
언이가 온다.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언이가 와서는
__빠. 잉나.
한다. 나 꿈쩍도 안한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터미네이터 투를 파견한다.
__엽아, 아빠 깨워.
엽이가 온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__아빠, 일어나.
한다. 나는 꿈쩍도 않는다. 그러면 그는
__엄마, 아빠가 안 일어나.
하고는 가서 TV나 본다. 나는 잔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터미네이터 쓰리를 파견한다.
__나우야, 아빠 깨워.
우가 온다. 조심해야 한다. 터미네이터 쓰리는 웬만해선 직접 나서지 않지만 한 번 나서면 확실하게 해치운다. 터미네이터 쓰리는 방문을 거의 발로 걷어차고 들어와서는 그대로 몸을 날린다. 내 비만의 몸뚱이 위로.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나는 터미네이터 쓰리가 오는 발걸음 소리에 벌써 잔뜩 긴장하고 있다. 문이 열린다. 나는 비굴하게 일어나 앉아 있다. 터미네이터 쓰리는 내가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휙 돌아나간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하는 갑다.
아무튼 또 아침이다. 아침형인간은 나의 원수다.
영어에 두음전환(頭音轉換 spooner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 루이 윌리엄스 세바스챤 주니어 3세의 친구인 윌리엄 A. 스푸너(1844~1930)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용어라고 한다. 이거 별거 아니다. 이런 거다. 즉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social position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pocial sosition으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다. 두 단어의 초성인 s와 p가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밖에도 이런 예들이 있다.
“a well-boiled icicle” for “a well-oiled bicycle”
“a queer old dean” for “a deer old queen”
a crushing blow를 a blushing crow라고 하는 경우 등
한국어는 표기체계자체가 음절 중심이라, 위의 예에서처럼 순수하게 ‘초성’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다만 ‘초성 + 중성 (+ 종성)’을 포함한 한 음절 전부의 순서를 바꾸면 이와 위의 예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이걸 넓은 의미의 스푸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요 일구이언은 이부자지라>와 <간음빙자혼인죄>같은 말장난이 생겨난다. 오호, 그리고 보라. 이 순 건달! 혹은 진짜 양아치! 혹은 이 썰렁한 작업남! 아무튼 웃기는 짬뽕 같은 오 이 남자!
__오, 아가씨. 커피 있으면 시간 한 잔 할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무실의 부속 화장실의 변기 앞 벽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조금 전에 보고 왔다.
__휴지는 변기 속으로!
내가 뭐하고 왔느냐 하면 <변기는 휴지 속으로!> 하고 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아이들 동화책 중에 <시내로 간 꼬마곰>이라는 게 있다. 제목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미련 곰탱이같은 꼬마곰이 시내 나갔다가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죽을 고생 살 고생 헛고생 생고생만 죽도록 하고 집에 돌아온다는 눈물과 한숨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줄거리의 책이다. 이걸 나는 꼭 <꼬마로 간 시내곰>이라고 읽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
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우리 심심한데 이걸 한번 바꾸어 보자. 개구리를 함부로 던지지 마라. 길가의 돌이 맞을 수도 있다. 맞는 돌 기분 나쁘다. 이거 넌센스다. 좀 웃기지 않는가?
나는 공공장소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테스트 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아, 마이크 시험중, 아아, 마이크 너는 지금 테스트 당하고 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대략 웃겼다.
바꾸라. 위치를 바꾸고 순서를 바꾸고 역할을 바꾸고 입장을 바꾸고 또 바꾸라.
바꾸라. 그리하면 웃길 것이다.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최승자, ‘워드 프로세서’
우리는 가끔 니가 먼저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니 옆구리 찔렀냐, 하면서 쓸데 없이 싸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지금 내 관심 밖이다. 내 관심은 무엇으로 옆구리를 찔렀을까, 이다. 난 이게 정말로 궁금하다.
수건? 전화기? 풍선? 의자? 선풍기? 자동차? 쓰레기통? 코딱지? 책?
이게 어색한 이유는 ‘찌르다’라는 동사에 내장되어 있는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니가 먼저 수건으로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수건으로 니 옆구리 찔렀냐?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자,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찌르다’라는 동사이다. ‘찌르다’라는 동사는 늘‘뾰족한 물체’를 데리고 다닌다. 말하자면 ‘뾰족한 물체’는 ‘찌르다’라는 동사의 배우자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천년만년 더불어 살아가 한 무덤 밑에서 또 영원히 지지고 볶는 배우자. ‘찌르다’와 ‘뾰족한 물체’는 우리 머리 속에서 아구찜과 꽃게찜처럼, 꽃게찜과 꽃게탕처럼, 해장국과 감자탕처럼, 라면과 공기밥처럼 붙어 다닌다.
문법은 주어가 단수일 때는 단수동사를, 복수 일 때는 복수 동사를 써야 한다는 것만이 분법이 아니다. 이렇듯 ‘찌르다’라는 동사에 붙어 다니는 ‘뾰족한 어떤 것’도 문법이라고 한다. 이게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의미론(semantics)이다!
의미론이야 더이상 나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게 정상이다.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언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언어 밖으로 쉽게 나가는 것. 오히려 이게 비정상이다. 자신의 모국어 시스템 속에서 잠시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고 해도 그래봐야 몇 걸음 못나간다.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지만 오십 보 백 보다. 다 정도의 차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차이다. 그러나 백 보에서 오십 보를 뺀 차이는 크다. 오십 보! 그리고 똥과 겨는 그 더러움에서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비정상이 되어야한다.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모국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짓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삭스는 아니지만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문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한다. 그리고 웃기는 신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맞다. 웃기는 거 완전 힘들다.
다음은 노암 촘스키가 만든 문장이다.
색깔 없는 초록색 아이디어가 난폭하게 잠자고 있다.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이럴 때 촘스키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 비정상을 사랑한다.
모국어의 시스템, 즉 문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자는 웃길 것이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웃기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