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음 긴 급 대 처 분
육 체 대 방 출 눈물의 고별전 80%
헐값, 또 헐값, 똥값, 또 똥값 소주 일병 + 계란말이 한접시 |
의미
1.
의미. 언제나 이게 문제다.
2.
“이 문장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내가 이 문장을 사용해서 전달하고 싶은 바의 ‘무의미’를 의미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율배반의 문장이 된다. 반면 “이오자가낳 암앚이쟈노.”라는 문장은 ─ 이거 문장 맞다. 따지지 마라. ─ 내가 의미하는 ‘무의미’그 자체이지만 기호로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기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이게 문제다.
3.
“무의미하다”는 “무가치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는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4.
인터넷에는 무의미한 사진이 너무 많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분명 바로 앞의 문장을 “인터넷에는 사진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사진이 너무 많다.”는 뜻으로 썼다.
5.
그렇다면 하나 묻노니, 사진이 사진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먼저여야 한다.
6.
이렇듯 어떤 대상의 의미를 따지기 시작하면 결국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이른다.
7.
그래서 의미. 언제나 이게 문제다.
8.
그러니 어느 경우에든 상대방에게 “당신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였나요?”하는 식의 질문 따위는 던지지 마라.
중간 예술 UN ART MOYEN
피에르 부르디외 外, 주형일 옮김, <<중간 예술 UN ART MOYEN >>, 현실문화연구, 2004
이 책은 ‘사진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보고서’다. ‘사진에 대하여’는 너무 막연하니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사진 행위’와 사회계급의 관계라든가 사진 클럽, 저널리즘 사진, 광고 사진, 예술 사진, 직업으로서의 사진사, 정신분석과 사진 등이 주요 테마다.
어렵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거기다가 엄청 두껍다. (역자후기와 찾아보기까지 포함하여 510페이지다.) 1964년에 이런 연구보고서가 쓰여졌다는 게 40년 뒤에 읽는 나로서는 참 놀랍다. 이 보고서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분석하면서 쓰여졌다. 한 마디로 ‘사진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체계적으로 요약정리할 엄두가 안난다. 그냥 읽다가 줄 친 몇개의 구절을 쓰고 땡쳐야 겠다.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서문>중에서만.
먼저 아비투스:
“객관적 규칙성들의 체계와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들의 체계사이에는 항상, 다름 아닌 아비투스라는 매개체가 있다. 아비투스는 결정론과 결정, 계산 가능한 가능성들과 체험된 희망들, 객관적 미래와 주관적 계획의 기하학적 장소다. 그래서 체계적이거나 정신적인 성향들의 체계, 혹은 사고 · 지각 · 행동의 무의식적 스키마들의 체계라는 의미를 갖는 계급의 아비투스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창조와 자유로운 즉흥 작업에 대한 ‘충분히 근거 있는 환상’ 속에서 객관적 규칙성들에 부합하는 모든 사고 · 지각 · 행동들을 행위주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p22)
“그렇지만 이미지의 생산이 완전히 카메라의 자동성에 귀속될 때조차도, 촬영은 여전히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을 갖는 선택행위다”(p23)
“…객관적이고 공통적인 규칙성들의 내면화인 ‘에토스’를 매개로 집단은 이 행위를 집단적 규칙에 종속시킨다. 그래서 하찮은 사진이라도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명백한 의도들 외에도 집단 전체에 공통된 지각 · 사고 · 평가의 스키마들의 체계를 표명한다.”(p23) 즉 아비투스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 장의 사진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 사진이 한 시대의, 한 계급의, 또는 한 예술 집단의 상징체계에 속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드러내는’ 잉여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다.”(p24)
책을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격언 하나:
“취향과 색깔에 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다.”(p98)
GO
가네시로 가즈키, 김난주 옮김, <<GO>>, 현대문학북스, 2000
우선 재미있는 구절 두 개:
콧잔등에 군밤을 다섯 대 얻어맞았다. 즐거운 추억이 다섯 개 지워질 만큼 아팠다.(p74)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집회에 모인 백 명의 인간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어.”(p79)
성장기 소년의 치기와 폭력과 문화와 페이소스와 사랑을 적당히 섞었다. 이 소설, 잘 나가다가 막판에 완전 깬다. 딱 만화다.
“그 남자의 움직임, 정말이지 얼마나 굉장했는지 몰라. 그 남자애 주변에만 중력이 없는 것 같았어, 전혀. 그 남자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것 같았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코트에 있는 상대편 선수들이 하나 같이 코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멋지다. 주인공이 농구하다가 상대 선수를 때려눕히는 장면이다. 이 정도면 싸움 하나는 정말 잘 한다. 그러니 이런 광경을 보고 뿅가는 일본 여자도 생긴다. 그냥 뿅가는 정도가 아니다. “거기가 젖어 있”을 정도로 뿅간다.
책날개에 있는 아버지가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느니 ‘일본사회에 내재한 민족차별의 극복’이니 하는 건 다 공허한 소리다. 그냥 싸움 잘하는 재일교포 3세가 어떻게 살았나 하는 얘기다. 중요한 건 “국적 따위”가 아니다. 연애다. 그러니 전혀 심각할 것도 없고, 특별히 감동 받을 것도 없다.
뒷 표지에 실린 찬사일색의 글들 중에서 아사히신문이 “마치 ‘재일문학’속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다.”고 했다는 데… 글쎄다. 아무래도 수준이 좀 그렇다.
“가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 일어원전을 보지 않았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이 ‘가자’가 소설의 제목인 ‘GO‘가 아닌가 싶다. — 가자니, 어디로? 어디긴. 자러 가야지. 날도 때마침 크리스마스이브다. 어쩌면 눈이 올지도 모른다. 아주 골고루 한다.
나
나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게 너무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