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기억난다. 내 생에 최초로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날, 나는 남루한 세간을 싣고 상경하는 트럭 짐칸에 타고 있었다. 귓전으로 바람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어머니가 삶은 계란을 까주셨다.

우리 가족의 상경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던 조국근대화물결과 관계가 있다. 더 직접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관계가 있다. 그 도로가 건설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앗아간 그 길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된 것이다.

이게 내가 “박정희 –> 경부고속도로 –> 삶은 계란”으로 이어지는 연상을 갖게 된 허망한 사연이다.

어제 박정희의 딸이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참 지긋지긋하다. 계란이나 한 판 사서 몇 개는 저들을 향하여 던지고, 나머지는 삶아 꾸역꾸역 먹어야겠다. 한 때 유행했던 어느 초등학생의 답안지에서처럼 가슴을 치면서

돼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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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아빠. 내가 돼지코 보여주까.
__그래.
__아빠. 봐봐.
__하하. 멋지다. 사진찍어주까.
__응.
__또 해봐.
__이렇케.
__응.
__또 해봐.
__이 렇게.
__응. 어떻게 나왔나 볼래.
__응.
__어때. 잘 나왔어.
__응.
__맘에 들어.
__응.

촉광 燭光 칸델라 candela candle 초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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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ed by 거시기님

초의 본래의 용도는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촛불은 독서나 바느질 등 실용적 목적의 조명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무드나 분위기 조성을 위한 조명으로 사용된다.)

종이컵의 본래의 용도는 액체를 담아 마시는 것이다. (빈 컵은 재떨이로 사용하거나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공작의 재료로 쓴다.)

위 사진 속의 초 하나가 뿜어내는 빛의 밝기가 1촉광cd이다. (정확히는 1燭이 1.0067cd라고 한다.) 30촉짜리 백열 전구의 밝기는 저런 거 30개의 밝기다.

2004년 3월 20일, 거리에 켜진 촛불의 밝기는 몇 촉일까?

아무튼지 아내여, 나도 카메라 달린 핸드폰 하나만 사주라. 나도 저런 거 한번 찍어보자.

하하. 바구니 만들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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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디비 자는 데 ‘우’가 깨우더니.

__아빠.
__응.
__바구니 만들 줄 알어?
__바구니?
__응.
__글쎄.
__아빠. 바구니 만들어 줘.
__아빠 바구니 못 만드는데…
__아이, 빨리 만들어줘.
__알았어. 색종이 가져와.

해서 바구니를 만들어 주었겠다. 잠도 깨고 해서 거사를 치루는 데
‘엽’이가 쪼르르 오더니

__아빠.
__응.
__나도 바구니 만들어줘.
__지금?
__응.
__알았어. 색종이 가져와.

해서 또 거사를 치루다 말고 바구니를 만들어 주었겠다.
맘 놓고 일을 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__엄마.
__응.
__이거 오릴 줄 알아?
__몰라.
__아이, 엄마 이거 오려줘.
__아빠한테 해달라고 그래.
__알았어.

하더니 쪼르르 달려 온다.

__아빠. 이거 오려줘.
__그게 뭔데.
__이거, 응 하트하고 별하고…응 또 이거하고

해서 보니 그런 모양이 새겨진 자를 들고 있다.
할 수 없이 자를 색종이에 대고 칼로 도려냈다.

사진은 그 결과물이다.
그나마 꼬맹이가 자서 그렇지.
안 그랬음 저런 바구니를 세 개나 만들 뻔 했다.
역시 자업자득!
혹은 애 셋 아빠의 가혹한 운명.

따위

여자는 더 이상 이혼남이나 상처한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따위의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밥투정 따위나 하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만 하면 나만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기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오빠와 올케들은 쉴새없이 선본 남자는 어떻게 되었냐, 네 나이가 몇인데 고르냐, 남자들 살다보면 다 같다는 식의 얘기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이정은, ‘붉은 끈끈이주걱’, <문예중앙>104, 2003 겨울

나는 지금 자전거 박물관에서 크랭커-31이라는 자전거의 설명을 듣도 있는 중이다. 박물관에는 하루에 한 번 자전거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시간이 있는데, 운 좋게도 그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설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하해봤자 세 명뿐이다. 하긴, 평일 한낮에 자전거의 역사 따위를 듣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김중혁, ‘바나나 주식회사’, <문학과 사회> 64, 2003 겨울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기형도, ‘죽은 구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

“나는 이해되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지. 나는 눈보라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서 선원들에게 날 돛대에 잡아매게 했지. 난 묶인 채로 네 시간을 보냈고, 그 눈보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꼭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느꼈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그리을 좋아해야할 필요 따위는 없다네.”

Snowstorm, 1842; Oil on canvas, 91.5 x 122 cm

//Turner, John Mallord William (1775-1851). 존 버거(지음), 박범수(옮김) <<본다는 것의 의미(원제: About Looking)>>, 동문선, 2000년 초판, 2002년 2쇄, p214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