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딸이 최고

큰 신문지 옆에 차고 화장실에 들어앉았다. 화장지가 없다.
__아빠, 화장지 갖다 줄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그러나, 아무도 아빠에게 화장지 갖다주지 않는다. 내 저희에게 좋은 옷 입히고 맛난 것 먹이기 위하여 그 좋아하는 미술관에도 안가고 오늘도 지구방위에 여념이 없건만. 어쩐다? 물러설 내가 아니다.
__아빠, 화장지 갖다 줄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그러나, 아무도 아빠에게 화장지 갖다주지 않는다. 어쩐다? 신문지? 에이, 그게 말이 돼? 오날날같은 대명천지에 신문지라니! 어쩐다? 할 수 없다.
__우야, 아빠 화장지 좀 갖다 줘~~.
그러나, 우는 투니버스 보느라 바쁘다. 이제 막 호빵맨이 세균맨을 무찌르려고 하는 찰나에 그까짓 화장지가 문제더냐, 하는 갑다. 어쩐다? 드러버라. 너만 자식이냐. 엽이도 있다.
__엽아, 아빠 화장지 갖다 주면 안잡아 먹지~~.
그러나, 엽이는 쬬코우유 먹느라 바쁘다. 이제 막 빨대 꽂았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도 돌려놓지 못하는 운명의 맛 앞에서 화장지라니? 그게 말이 돼요? 아빠, 하는 갑다. 어쩐다? 이제 신문도 다 읽었는데…엉거주춤 일어나 몸소 가지러가? 에이 그게 말이 돼? 어쩐다? 너만 자식이냐. 언이도 있다.
__언아, 아빠 화장지 갖다 주면~~,
하려다가 나는 멈춘다. 에이 그게 말이 돼? 18개월짜리가 화장지가 뭔지나 알어? 어쩐다? 뭐 이런 그지같은 경우가 다 있담? 자식새끼들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 오, 그대 언제나 만만한 나의 아내여!에게 부탁할까? 안돼! 아내는 오늘 아침에 계속 내 청춘을 돌려달라고, 언제나 되어야 아침식탁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곁들인 식사를 하느냐고, 어느 세월에? 하며 청춘을 보상하라고 난린데, 거기다가 대고 화장지 달라고 하면, 그게 말이 돼? 어쩐다? 어쩐다? 그래 역시 신문지가 최고야! 신문지? 그래! 신문지!

하는 순간에

우가 불쑥 화장지를 내민다. 눈물이 다 날려구 그런다. 역시 맏딸은 살림 밑천이다. 앞으로 우만 집중적으로 예뻐해야겠다.

10. 바보는 웃긴다

영화 <덤 앤 더머>:
바보와 더바보가 사막의 길을 걷고 있다. 웬 관광버스가 이들 앞에 멈춘다. 그러더니, 허걱, 쭉쭉빵빵한 언니들이 내린다.

“어이, 형씨들!”

바보와 더바보 이게 웬떡이냐 싶은지 모공이 확대되고 바로 언니들 앞에 넙죽 대령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언니들이 대답한다.

“그게요. 그러니까 말이죠, 우리는 보시다시피 미녀들인데, 우리는 지금 무슨 미인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인데, 우리가 우리 등에 오일을 발라줄 바보들을 찾고 있거든요. (혹시 이 일에 관심있쑤?)”

바보와 더바보, 누군지 그 일을 맡게 될 바보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러워한다. 그래서 대답을 한다.

“저쪽으로 쭉 가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면 언니들 등에 오일 발라줄 행운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언니들, 뭐 이런 띨빡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짓더니 차문을 닫고 휭하니 출발한다.
이때 바보가 갑자기 더바보를 때린다. 바보와 더바보가 황급히 버스 꽁무니를 쫓아간다.

“이봐여, 언니들, 잠만여!”

가던 버스가 멎고 좀 전의 쭉쭉빵빵 언니들이 다시 내린다. ‘짜식들’ 하면서!
그러나 아니었다. 바보와 더바보는 언니들한테 마을로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고 말한다. 언니들, 정말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차문을 닫고 가버린다. 영원히 가버린다. 바보와 더바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언니들 등에 오일을 발라주게 될 행운아들을 부러워한다. 영원히 부러워한다.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상황 끝이다.

바보는 웃긴다. 그러니 가끔은 바보가 될 필요도 있다.

대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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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부재하는 동안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케어합니다. 큰 아이 ‘우’는 컴퓨터를 합니다. 야후! 꾸러기 > 전래동화 > 떡보 만세를 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나라 사신이 떡보에게 “네가 삼강을 아느냐?”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자, 마침 사신을 만나러 가기 전에 떡을 다섯 개나 먹은 우리의 용사 떡보는 ‘내가 떡 다섯 개 먹었다. 어쩔래?’ 하는 의미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보입니다. 멍청한 당나라 사신은 ‘아, 저 놈이 삼강은 물론이고 오륜도 안다는 구나. 거 똑똑한 놈이로세.’하고 이해합니다. 네, 떡보는 저 방법으로 나라를 구합니다.

둘째 아이 ‘엽’은 ‘어깨 너머’ 전문 선수입니다. 아니 꼽지만 꾹 참고 제 누나가 야후! 꾸러기 하는 걸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했는지 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 합니다. 제목은 ‘동물의 생활’입니다. 이 책 좀 웃깁니다. 첫 페이지부터 대뜸 한다는 소리가 ‘모든 동물이 살아가는 목적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예요.’입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알려준 책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며, 새끼를 더 낳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엽’이는 우리의 용사 떡보가 당나라 사신을 무찌르는 모니터를 보랴, ‘동물의 생활’ 들으랴 바쁩니다. 곧 ‘모니터’가 우세승을 거둡니다. 나는 동물의 성생활 읽기를 슬그머니 멈추고 내 책을 읽습니다. ‘엽’이는 잠시 후 다시 ‘아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하더니 가서 다른 책을 가져옵니다. 이번에는 ‘물고기의 생활’입니다. 도대체 왜 동물도 생활을 하고 물고기도 생활을 하는 걸까요?

셋째 ‘언’이는 다행히 젖병하나 꿰차고 잠들었습니다. 이 상태로 한 시간 정도 지납니다.

마침내 ‘우’가 주무시겠답니다. ‘거,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로세.’ 나는 속으로 뛸뜻이 기뻐하며, 그러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우’를 재우러 들어갑니다. 그동안 ‘엽’이는 레고를 하거나 공룡을 그리거나 할 겁니다.

하여, 막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가 돌아옵니다. 아내가 돌아오는 소리에 아이들은 어느 시인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자동화사격장의 표적지’처럼 벌떡 일어나 뛰어나갑니다. 네, 엄마 맞습니다. 엄마가 왔습니다.

엄마를 본 ‘우’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됐어. 아빠. 이제 아빠는 가도 돼.”

나무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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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안에 켜켜이 결을 쌓아 온 나무가
꼭 뭐가 되려고, 굳이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를테면 출세 같은 걸 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혹은, 나무가
감히 하늘 끝까지 닿아보겠다고
제가 무슨 바벨탑이라도 되는 양 끝끝내
하늘을, 딱 한 번만 하늘을
더듬어보겠다고
저 보이지도 않는 발버둥을 치며
허구헌 날 땅을 쪽쪽 빨아 먹은 것도 아닐 것이다.

나무는 그저
제가 나무였으므로
나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므로
평생을 나무 노릇이나 하며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