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

애벌레가 알에서 천천히 빠져 나옵니다.
바늘 같은 입도 작은 낫 같은 앞다리도 제대로 생겼습니다.
아빠물자라의 등 위에서 듬뿍 공기를 마시고 흰 몸을 폅니다.
저것 보세요. 넓적한 모양의 애벌레입니다.
아빠물자라가 물 속으로 살짝들어가 애벌레를 물에 띄웁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

─ 자연의 신비 20, <물자라>, 교원

밤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나름대로 목소리 연기까지 합니다.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합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읽기를 멈추면 아이는 ‘땡깡’을 부립니다. 아마도 책읽는 소리를 무슨 사운드 이펙트나 제 놀이의 배경음악 쯤으로 여기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여어여 읽어 마지막 페이지에 닿아야 책 읽어주기의 괴로움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계속 읽습니다. 잠시 딴 생각을 했나봅니다. 눈이 텍스트를 쫓아가고 입이 한음절 한음절 텍스트를 발음하지만 나는 내가 소리내어 읽는 문장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불성실한 아빠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문장을 만납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라는 문장입니다. 나는 잠시 아득해집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서둘러 책읽어주기를 마칩니다. 제 난데 없는 도리질에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왜 그래?” “응, 아냐 아무것도”

3. 과장하면 웃긴다

다른 사람을 웃기는, 며느리도 모르는, 방금 외계에서 전해온,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림사 창건 이래 누대를 일부 극소수 고수들에게만 전해 내려온 비법을 알려드리겠다. 뻥이 좀 심했다. 아무튼 다른 사람을 웃기고자 하는 의도와 의지와 자세와 태도를 가진 자가 배워야 할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수사학이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과장법이다. 과장! 이는 실제보다 크게 떠벌리는 것을 말한다. 아시다시피 침(侵)은 작고 봉(棒)은 크다. 뭐든지 침소봉대하는 것. 가령, 바늘만한 무서움과 떨림을 야구방망이만한 전율과 공포로 확대하는 것. 뭐 이런 것이 과장법이다. 황과장! 내 과장이 무슨 과장인지 아시겠지요?

표현을 과장하라.
어젯밤에 모기 한 마리가 웅웅거려서 잠을 못 잤다고 말하지 말고, 어젯밤에 모기 한 마리가 귓가에서 천둥을 치는 바람에 잠을 못 잤다고 말해라. 그대가 그립다고 말하지 말고 그대가 300Km나 그립다고 말하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도 사랑한다고 말하라.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어’도 사랑한다고 말하라.
Continue reading

11시의 컴플렉스

[…]그리고, 좀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11시의 컴플렉스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오전 11시의 아파트 거실에 퍼지는 커피 향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 널고, 그러고 나면 11시 무렵이지 않겠는가. 그 다음엔 뭘 할까.[…]

─ 박금산, ‘통’, 문예중앙 104(2003 겨울)

엄마

불행하게도 ─ 하하, 불행하게도라고? ─, 내가 내 생애에 처음으로 발음한 완전한 단어는 ‘열쇠’라든가 ‘꿈’이라든가 하는, 문학적 재능의 징후를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그저 ‘엄마’였다.

─이인성, <한없이 낮은 숨결>, 문학과지성사, p59

2. 다르면 웃긴다

여기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가난한 영화감독과 남편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삵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석봉 모(母) 같은 아내가 있다. 이들에게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온다. 대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선배다. 아내는 조촐한 술상을 준비하고 이들은 오랜 만에 이야기꽃을 피운다. 결국 화제는 영화로 옮겨 온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찍는 남편의 성공가능성으로 옮겨 오고, 생활고로 옮겨 온다. 남편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안 되면 상업영화를 할 거니깐.”
다큐멘터리 영화하던 사람이 상업영화를 하겠다고 나오는 것도 대단히 많이 양보한 것이다. 물론 상업영화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려나 남편은 이 말도 큰 맘 먹고 한 거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이렇다.
“상업영화는 무슨…, 농업영화면 또 몰라도…….”
아내의 이 말에 다큐멘터리 찍는 남편과 그들을 찾아온 손님이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

자, 우리들에게 ‘상업영화’라는 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말은 ‘예술영화’나 ‘작가주의영화’뭐 이런 말들이다. 우리들에게는 지금까지 ‘상업영화’의 반대말로 ‘농업영화’를 떠올려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
이렇게 기존의 것,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웃긴다.
우리의 두뇌는 어떤 상황이나 말이 주어졌을 때 그것과 연관되는 그 다음에 일어날 것에 대해서 기대한다. 이 기대는 대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다. 아니면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웃기고자 한다면 상대방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사전 작업을 한 다음에, 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면 된다.
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기대하고 있는 것과 다른 걸 말하거나,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한다. 다른 걸 말하거나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익숙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사물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의식이 자유로워야 하고, 생각이 자유로워야 한다. 고착되지 않은, 판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생각을 다르게 하라. 표현을 다르게 하라. 행동을 다르게 하라.
발 냄새난다는 표현 대신에 ‘양말 먹었냐’는 표현을 최초로 생각해 낸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는 표현 대신에 ‘쥐 잡아 먹었느냐’는 표현을 최초로 생각해 낸 사람도 나는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