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에 시다

산에는 대부분의 나무가 비탈에 서 있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평지를 꿈꾸는지는 알 수 없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비탈 저 아래 나무에 견주어 자신의 처지를 만족스럽게 여기는지도 알 수 없다. 산은 무엇보다도 비탈이고 산에 살고자 하면 비탈에 정착해야 한다.

고혈압 바위

안녕하세요. 나는 고혈압 바위덩어리입니다. 미동도 없이 붕어처럼 퍼덕거리며 이 슬픔의 궤도를 묵묵히 지나가는 중이죠. 이 환란의 삶에서 그래도 근근이 몇 문장만 더 쓰고, 다만 안녕히 계세요, 하고 작별인사를 하겠습니다. 이것은 첫문장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고양이 나쁜 놈

손님 맞이용으로 올려놓은 꽃병의 꽃을 고양이가 먹는다.

야, 너 뭐해. 내려 와. 안 내려 와.

화들짝 제지하는 아내이다.

나는 세상의 간난에 시달리고 나부끼다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집에 오니 슬픈 소식이 당도해 있다. 시속 30km/h 구간에서 42km/h로 달렸다고 과태료 통지서가 당도해 있다.

야, 너 삐졌어?

고양이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내가 고양이를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삐지고 달램 받는 것은 본 따위님이나 하는 거인데,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살다살다 이제는 고양이하고 애정을 다투게 생겼다. 어서 삐져야 하는데 당장은 삐질 일이 없다.

오늘의 문장

그 둘은 레이터의 표현을 따르면 “행복한 허튼짓들을 하며 세월을 허송했다.”

—사울 레이터, 열화당 사진문고

잘 시고 있다 1

요즘 나는 토마토, 줄 바꿔서, 스파게티소스 빈 병에 대고 시를 중얼거린다 다 중얼거리고 나면 병 뚜껑을 얼른 닫아 한 켠에 잘 두었다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내다버린다 얼마 전까지는 변기에 대고 시를 중얼거린 다음에 시물을 확 내렸는데 그게 내 시한테 너무 못 할 짓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산길에서 중얼거리고 개천길에서 중얼거리고 봉고3 수동변속기를 조작하며 중얼거리며 이토록 잘 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