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estine was awarded condominium by Britain, France, Russia.” ─ p172
예술가 후원의 어려움
아빠, 내가 왜 마트 가려고 그러는지 알아?
몰라. 왜?
종합장 사려구.
종합장은 뭐하게?
그림 그리게.
그림 그릴 데가 없어?
응. 복사용지는 좀 그렇잖아.
알았어.
우리집 꼬마 예술가 선생을 지원하기 위해서 달포 전에 거금을 들여 수입 수채화 용지(made in Italy)를 사 주었는데, 웬걸, 예술가 선생의 동생 녀석과 누나가 덩달아 달라붙어 수채화 용지를 함부로 쓰는 바람에 ‘아이쿠야, 저 녀석들한테 미술 재료 사 대다가 집안 거덜 나겠다’ 싶어서 그냥 복사 용지나 한 묶음 사주고 말았더니, 그래놓고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더니, 예술가 선생이 기어코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오호, 통재라.
우리에겐 타인을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이제 막 저편에서 이편으로, 한 마리의 배 나온 돌고래와도 같이 힘겹게 건너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툭 친다. 돌아보니 수영강사다. 자기 수강생이라고 알은체를 하는 거다. 강습 없는 날 혼자 나와 연습하는 제자를 보니, 딴에는 기특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 열심히 하시네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 예.” 그러고선 그는 휑하니 가버리고, 나는 또 멀고 먼 레인 저쪽을 노려본다.
음~파! 음~파! 다시 피안을 향해 헤엄쳐 가며 호흡과 호흡 사이에 나는 생각에 잠긴다. ‘흥, 아버님이 뭐야, 아버님이.’ 그렇다면 수영강사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했을까.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할 리 없으니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저기요’도 그렇고, ‘이봐요’도 아니고, 막 해보자는 게 아니면 ‘코 큰 아저씨’할 수도 없을 테고, ‘선생님’도 우습고, ‘수강생님’은 낯 간지럽고, 그렇다고 막말로 ‘형’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를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우리에겐 타인을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거품
다 저녁 무렵 그는 집을 나선다. 그는 약속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온지 4년만에 그는 아주 낯선 사람들과, 그러니까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 이곳은 아직 나무 한 그루 보도 블럭 하나도 다 낯설다. 그나마 신도시라 지상에 전봇대는 없다. 전봇대가 있었다면 그 중의 한 전봇대와 그는 틀림없이 깊게 사귀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미숙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노력한다. 대화가 오고 갈수록 어쨌든 사람들과 만나고 살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다 아프다. 그는 어떤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 노골적으로 그는 절실하다. 가까스로, 자아를 추스리며 집에 돌아온다, 그는. 오는 길 때 맞춰 비가 내린다. 그러나 비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힘들게 양치를 하며 그는 어떤 시구를 생각한다. 정확치는 않으나, 사람을 만나고 온 파도 거품 버릴 데를 찾아…였던 것 같다. 이제 그는 자신의 과거조차 제대로 인용하지 못한다. 이 시구를 말하는 사람을 그는 단 한 차례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니가 만나고 온 게 사람이 아니라 고작 거품이었니, 라고 그는 자문한다. 그는 오늘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낯선 사람들은 낯설다. 그에게 낯설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자신의 거품을 버리러 그곳으로 떠났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