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한테 무리한걸 요구하지 마라”

대화 중에 암호나 신용 카드 번호를 절대로 알려주지 마십시오.

따위 님의 말:
잊어야 할 게 너무 많았던 모양.
따위 님의 말:
술 먹고 한 짓을 복기하는 중.
현: 순하게,,, 님의 말:
???
현: 순하게,,, 님의 말:
오디야?
따위 님의 말:
행여 인터넷에는 주정하지 않았나
따위 님의 말:
확인중.
현: 순하게,,, 님의 말:
어젯밤에?
따위 님의 말:
현재까지는 별 거 없음.
현: 순하게,,, 님의 말:
술한테 무리한걸 요구하지 마라
따위 님의 말:
집.
따위 님의 말:
깨어보니
따위 님의 말:
아침이네
따위 님의 말:
오늘 못나가지 싶다.
현: 순하게,,, 님의 말:
저런….그래 푹 쉬고 멀쩡하게 월욜에 보자
따위 님의 말:
하하. 바이.
현: 순하게,,, 님의 말:
바바이

p.s.
“술한테 무리한걸 요구하지 마라”
메신저 저쪽에서 따위에게 이런 말을 해 준 그에게 무한 애정을 표현하며…

이 시간에 아빠가 집에 있으니, 언이만 신이 났다. 같이 놀자고 아주 난리가 났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애 셋 아빠다. 이게 나다. 이 따위 인간의 자기정체성. 애 셋 아빠. 나. .

p.s. to p.s.
기쁜 소식 하나 더.
어제 교보문고에서 산 그 “엄청난” 책을 분실하지 않았다는 것!

식탁 스케치

어제 밤에는 아이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림을 그리게 했다. 무얼 그리냐고 묻길래 사람을 그리라고 했다. 아빠도 하나 그리라고 해서 나도 그렸다. 딱 2초 걸렸다. 얼른 그려주고 나는 딴 짓을 할 요량이었다. 내가 그린 사람 그림을 보더니 나우가 말했다. “졸라맨.” 옆에서 엽이가 말했다. “마자.” 아무려나 나우는 내가 그린 그림이 영 이상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내 그림에 100점이라고 적어 주었다. 나는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잠시 후, 나우는 여자 아이를 그리더니 나더러 몇 점이냐고 물었다. 나는 97점이라 적어 주었다. 순간, 나우는 삐졌다. 단단히 삐졌다. 내 졸라 형편없는 졸라맨에 무려 100점을 주었는데 자신이 그린, 예쁘게 채색까지한 그림에 아빠가 주는 점수가 고작 97점이라니, 이건 뭔가 불공평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엽이가 물었다. “아빠는 왜 맨날 책을 읽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나우가 그린 그림에 97점이라고 적었던 걸 지우고 100점이라고 써서 침대에 누워서 아빠가 저를 달래주길 바라며 식탁을 빼꼼히 내다 보고 있는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비로소 슬그머니 나와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은 계속 그림을 그렸고, 나는 책을 읽었다.

겨울 나무

041215_winter_tree.jpg
─ fm2, 50mm 1:1.4f, ILFORD DELTA 400

염려 말아요
나, 춥지 않아요
옷 벗은 것도 아니구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도 아니어요
난 그저 내 방식대로 계절을 지나가는 거예요
그게 나예요
그래요
나는 겨울 나무예요
당신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한

밤 버스

텅 빈 수족관의
뒷자리에 앉아

아저씨, 우리 바다로 가요.
아저씨, 우리 바다로 가요.

아저씨, 아저씨,
우리,
바다로 가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지시선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