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빵굽는 타자기: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Hand to Mouth: A Chronicle of Early Failure >>, 열린책들, 2000

한글제목 “빵 굽는 타자기”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의미의 원제 “Hand to Mouth”처럼 직접적이지 않다. 직접적이지 않은 만큼 낭만적이다. 그만큼 배고픔의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니 제목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보자. 빵은 ‘밥’을 넘어 ‘생계’를 지나 ‘생존 그 자체’를 뜻하는 환유이고 타자기는 ‘글을 쓴다.’는 행위를 의미하는 환유이다. 이 두 겹의 환유를 걷어내면 의미는 명확하다. 이렇게 해보자.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살기” 됐다. 책 제목으로는 멋대가리 하나도 없지만 느끼한 낭만은 쪽 빼고 팍팍한 건더기만 남았다, 고 치자. 혹 너무 평이 하다 생각이 들면 조금 고상하게 “생존의 글쓰기”라고 해도 되고.

자,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가 말이다. 의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고 작가 말이다. 그러나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안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작가가 된다고 했겠나?

그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작가가 되겠다고? 왜? 도대체 작가가 뭐 길래? 언제나 그렇듯 이 “왜?”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젊은 날, 그는 열심히 쓴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다. 시도 쓰고 평론도 쓰고 소설도 쓰고 희곡도 쓰고. 배도 타고, 여행도 하고, 번역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면서 쓰고 또 쓴다. 늘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쓴다. 쓴다. 쓰고 또 쓴다. 작가는 써야 작가니 쓴다.

그러다가 생활에 궁핍해지고 막판에 몰리자 딴 짓도 해본다. 일테면 카드야구게임을 개발해서 “일확천금할 꿈”을 꿨다가 좌절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내보기도 한다. 뭐 되는 일이 없다. 그래도 쓴다. 쓴다는 걸 멈출 수는 없다. 나는 작가가 될거다.

“나는 더 이상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생존의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또 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살로 위장한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흔하디 흔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180도로 확 뒤집은 소설, 즉 타살인줄 알았는데 밝혀보니 자살로 끝나는 탐정소설을 하나 쓴다. 그러나 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출판을 해야 한다. 출판도 쉽지 않다. 그 와중에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고 “원고는 비닐봉지에 처박힌 채 거의 잊혀진 상태”다. 또 4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동안에도 그는 쓴다.

새로 출판사를 차리는 친구가 “혹시 쓸 만한 원고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길래 그 ‘비닐봉지에 든 원고’를 넘긴다. 원고를 넘겼지만 책을 만드는 일은 또 “2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하다. 드디어, 바야흐로, 마침내, 파이널리 책이 나왔으나 책은 팔리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페이퍼백’ 출판사에게 원고를 보내 본다. 죽을 때 죽더라고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다. 쉬운 말로 못먹어도 고! 실랑이도 흥정도 속셈도 없이 계약을 하고 “단돈 9백 달러”를 손에 쥔다.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에이, 또 그날 아침이 생각난다. 아,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 간밤에 또 뭔 짓거리 하느라고 늦게 잠든 나를 깨우며 아내가 말했다. “자기야, 우리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인간이 돼보자.” “싫어.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작가가 될 거야.” 내 대답을 들은 아내가 중얼거리며 나갔다. “작가는 작품이 있어야 작가지. 아무나 작가야.”

앞니 빠진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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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6월 23일 서대문자연사박물관, nikon N50 tamron 28-200mm 3.8~5.6f fuji superia 200

Running in the Rain

1.
그렇게 꾸역꾸역 계란을 먹으며 상경한 우리 가족은 모래내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아버지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몇 달씩 집을 비웠고, 엄마는 개울 건너 공장엘 다녔다.

어느 해 여름, 정말 비가 많이 왔다. 누나와 형은 학교에 가고 나만 집에 혼자 있었는데 천장에서 비가 샜다. 무려 세 곳에서. 나는 부엌에서 노란 빠께스 하나와 검붉은 고무다라이 하나와 하얀 스덴 세수대야를 가져다가 방바닥에 주욱 늘어놓고 빗물을 받았다.

그러나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빗물은 곧 빠께스와 고무다라이와 세수대야를 흘러넘칠 기세였다. 나는 빠께스, 고무다라이, 세수대야에서 차례대로 물을 한 바가지씩 덜어내어 방문턱을 지나 부엌 문을 열고 밖에 버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엄마는 허리까지 불은 개울물을 위태위태하게 가로 질러 집에 왔다. 난 그때까지 계속 바가지로 물을 퍼나르고 있었다. 가끔씩 걸레로 방바닥에 튀는 빗물을 닦아내 가면서. 내가 아직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니 아마도 지금의 나우만했었나 보다.

2.
나는 들국화 노래 ‘사노라면’의 2절이 1절보다 좋았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쫘악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3.
78Kg.
달리기를 시작한지 4개월 만에 가져보는 몸무게.
감량목표치의 딱 절반을 줄였다.
더구나 이틀전부터 허리띠를 한구멍 안쪽으로 매게 되었다.
오늘도(혹은 밤 열두시가 지났으니까 어제도) 나는 뛰었다.
처음 뛰기 시작할 때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던 비는 다섯바퀴를 돌 때 쯤엔
굵은 빗줄기로 바뀌었다.
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후두둑 빗소리가 났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아. 종이 울려서. 장단 맞추니~
마음 같아서는 한 옥타브 위에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숨이차서 헉헉거리기도 힘들었다.
쫄딱 젖었다.

4.
내가 좋아하는 말 하나;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본 속담으로 기억한다.

5.
비가 오면 하고 싶은 거 두 가지;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2층 창가에 앉아 뜨거운 빨간 체리 차 마시기.
고음으로 아주 까마득하게 올라가는 바이올린 듣기.

6.
헐.
비 맞고 한 번 뛰었다고 이거 너무 센치해졌다. 하니,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아니가, 할랬더니 유행지났다 아이가. 고마
자자.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뉴욕 3부작 The New Your Trilogy>>, 열린책들, 2003

어느 날 평소 웬수처럼 친하게 지내던 카피라이터의 집에 놀러갔다. 뭐 하러? 술 마시러! 그날도 우리는 뭐 “인생 뭐 있나?” “노세, 노는 게 남는 거네.” 하며 시시껄렁한 얘기나 나누었다. 무슨 얘기 끝에 이 카피라이터가 나더러 책 한권을 내밀더니 가져가라 했다. 나는 됐다, 그랬다.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드나들며 그의 책을 한 권 두 권 말하고도 집어가고 말 안하고도 집어가는 걸 알고 있던 터에 나까지 그런 탐욕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의 책이 우리 집에 딱 한 권 있기는 있다. 결국 나도 똥 묻은 개까지는 아니지만 겨 묻은 개정도는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집에 빼오고 싶은 책이 아직도 한권 남아있다. The Body라고. 사진책이다. 치토스를 노리는 치타처럼, 언젠간 쌔벼오고 말거야.) 아무튼 그가 그때 날더러 가져가라던 책이 폴 오스터의 < <빵굽는 타자기>>였다. 나는 안 가져왔다. 속으로 참나, 빵 굽는 제빵기는 들어봤어도 빵 굽는 이상한 불량 타자기는 처음 들어봤다, 하면서.

결국 나중에 내 돈 주고 < <빵굽는 타자기>>를 사서 읽었다. 지금 그 책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독후감 다 쓰면 다시 읽어볼 참이다.) 다만 책 표지에 적혀 있던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는 문구만 기억날 뿐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니!

내가 폴 오스터를 더 읽어 보기로 한 건 어느 블로그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그 블로그까지 흘러 들어가게 됐는지 이제 와서 알 길이 없지만, 해서 지금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그 블로거가 자랑처럼 찍어서 올린 책꽂이 사진에는 폴 오스터의 책들만 빼곡히 꽂혀있었다. 폴 오스터? 난 별루 재미 못 봤는데 이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그를 지나치게 저평가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이 책이다. < <뉴욕 3부작>>

3부작이니 세 편의 소설이 있다.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 제목들부터 뭔가 있을 것 같다. 뭐 소설 제목들이 다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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