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밥도 안 주고 나는 뭐 한 것일까?

여태 애들 밥도 안 주고 뭐 했어? 간밤에 늦도록 방자전과 동태전을 부치시느라 꼭두새벽에 잠자리에 드셨다가 오전 11시 50분 쯤에 일찌감치 일어나신 아내님께서 나를 보자마자 일갈! 하신다. 오매, 무섭다. 그러고 보니 가스불에 얹어 놓은 밥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남들은 저런 냄새를 탄내라고 부른다고 한다. 늘 그렇지만 남들은 이상하다. 생각하는 것만 아니라 냄새 맡는 것도 이상하다. 아무려나 요즘 들어 부쩍 ‘늙어서 보자’는 덕담을 입에 달고 사시는 아내님이 뭐라 그러시니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밥상을 차릴 수밖에! 하여 우선 식탁을 훔치려고 행주를 빠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맙소사, 따님께옵서 어느 결에 내 뒤에 와서 슬쩍 키를 재보고 있다. 며칠 지나면 나를 추월할 기세다. 그렇게, 추석빔 하나 못 얻어 입은 추석 전날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듯이, 간다.

어떤 사진 때문에

컴퓨터를 켜놓고 책을 읽고 있는 동안 화면 보호 모드에 돌입한 모니터 화면에 아내님과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찍은 사진이 떠올라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가 보다. 사진이여, 내 모니터를 공정하게 보호해주기 바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진 속의 어떤 물체가 내 시선을 사로 잡는다. 그 물체는 주무시는 아내님의 발치에 놓여 있다. 웅크리고 있다. 물체는 검다. 읽으면 교양의 수준이 요즘 채소값 맹키로 팍팍 치솟는 심오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그 따위 물체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 물체가 얼마 전 죽은 고양이라는 걸 깨닫는다. 저기 한 생명의 흔적이 있다. 2년 넘게 이 집에서 시쳇말로 동고동락했던 생명의 흔적이 있다.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고양이의 유골을 산에 묻어 주고 오던 날 생각이 난다. 이런 제길! 굿 모닝.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실험심리학자들은 침팬지의 문제 해결 능력을 연구한 어느 교수의 경험담을 즐겨 이야기한다. 침팬지가 점프를 해도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바나나를 매달아 놓았다. 방 안에는 나무 상자 몇 개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전혀 없었다. 이 실험의 목적은 분명했다. 침팬지가 나무 상자를 쌓아올려서 그 위에 올라가 바나나를 딸 생각을 하느냐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침팬지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교수가 나무 상자를 여기저기 갖다 놓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침팬지는 끈기 있게 기다리가다, 매달린 바나나 바로 밑에 교수가 다가가자 순식간에 교수의 어깨 위로 뛰어오르더니 점프를 하여 바나나를 낚아챘다.”

–마틴 가드너(지음), 이충호(옮김), <<이야기 수학 퍼즐 아하!>>, 사계절, 2008 2판 1쇄, 서문

똥물도 거르면 이슬인 것을!

“흔히들 한국 쎄일즈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두 사람의 ‘스타일’을 많이 비교한다. 말하자면 윤석금 씨는 ‘똥물도 걸러서 쓰는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건 없건, 지나간 공과와 상관없이 본인이 일하고 싶다고 하면 받아들였다. 한 사장은 한번 밉보면 다시 보지 않았다. 험이나 실수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강운구와 쉰여덟 사람(지음), <<특집! 한창기>>, 창비, 2008

“윤석금 씨”가 ‘똥물도 걸러 쓰는’ 용인술로 오늘의 웅진그룹을 일궈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웅진熊津은 충남 공주의 옛이름으로 곰나루라는 뜻이다. 나는 웅 자 들어가는 말은 다 싫다. 곰 웅 자나 수컷 웅 자나 마찬가지다. 성웅, 영웅, 간웅, 웅비, 자웅, 웅담. 하다못해 이름에 ‘웅’자 들어가는 녀석은 친구로 삼지도 않았다. 아무튼 곰나루에 얽힌 사연은 위키백과를 참조할 것.

저 구절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똥물도 걸러 쓴다’는 표현 때문인데, 말하자면 나는 ‘이슬’도 걸러 가면서 먹고 살아온 까탈스런 품성의 소유자인 까닭에 ‘똥물’ 하고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럽기 짝이 없었다. 기실 나도 똥물에 불과하면서 유난을 떨기는 떨었다!